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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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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다.

 

류자광(柳子光, 1439년 ~ 1512년 6월)은 조선의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복(于復), 우천(宇天)이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황해도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영경연사, 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그 남자의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다. 특히 임사홍 등과 함께 연산군갑자사화를 도왔다. 사림파 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10년 이후 그를 옹호하는 견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술, 음악, 지리에도 등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복수할 기회를 노린 류자광은 1498년(연산군 4년)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編纂)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를 올려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비유(譬喩)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 인사를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끌려와 의금부형조에서 고문당할 때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입수하여 사본을 내놓으면서 이 중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찾아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문장인데 김일손(金馹孫)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

 

라고 말하였으며, 원본은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에게 바치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류자광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스스로 주석(註釋)해 문구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어 "김종직세조에게 부름받았는데도 감히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세조를 비방(誹謗)하고 헐뜯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서 논죄하고 그 남자가 지은 글은 후세에 전파(傳播)되어서는 아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라며, 김종직의 저서와 작품의 압수와 관련자 처벌을 건의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를 처벌할 증거 자료를 입수하여 연산군에게 바친 공로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1498년 11월 함경도에 붙은 연산군을 비방(誹謗)한 벽서를 조사하고자 파견(派遣)되었다.

그 해 말 산릉 제조[山陵提調]에 임명되었으나 부당하다고 양사(兩司)에서 비판받았고 1499년(연산군 5년) 1월 생전복과 굴조개를 연산군에게 사사로이 헌납했다가 지평 권세형 · 정언 윤은보에게 탄핵받았으나 연산군은 이를 듣지 않았고 윤은보는 3개월간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사사로이 진상물을 바친 류자광을 탄핵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다.

유지광은 자신이 여종의 아들이라 미천한 종이나 악공(樂工)과 화원(畵員) 등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였고 왕에게 도공(陶工)들을 아끼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1504년 10월, 사옹원 제조(提調)로 있을 때 류자광은 수라청의 나인들이 수라상(水剌床)을 힘들게 옮기는 것을 보고 동정하여 그해 10월 1일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할 것'을 건의하며 하인들을 아끼라고 청하였다.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操心)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류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도 아뢸 것이 아니다. 류자광을 국문(鞠問)하라."

이때 연산군의 노여움을 받아 국문당하였으나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고 이시애의 난의 진압에 훈공을 세웠으며, 여진족(女眞族)과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인정되어 불문율에 붙여졌다.

1501년 서거정(徐居正)이 자신의 저서에서 류자광이 한명회를 비판한 일을 잘못이라고 기술하자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대왕대비의 옹호(擁護)를 예로 들어가며 서거정의 저서를 비난(非難)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류자광의 서거정 비판이 문제시되어 그 해 11월 사헌부사간원에서 줄기차게 탄핵당했다.

1503년 사옹원 제조를 거쳐, 그해 9월 왕에게 고을의 수령들이 진상한다는 이유로 항상 강무장(講武場)에서 사냥하는 것과 사사로이 사냥하는 것을 금하게 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받아들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그와 절친했던 임사홍과 관련되어 사림에게 비난(非難)받게 되었다.

 

중종반정에 가담

1501년 겸 오위도총관(兼五衛都摠管) 등을 지냈다.

서기 1504년 연산군 재위 10년에는 이극돈의 형제인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아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되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그 뒤 무오사화갑자사화의 원흉이라는 공론 때문에 대간들에게 여러 차례 탄핵되어 한때 파직되었으나 판부사로 복직되었다.

1505년 1월 석결명(石決明)을 왕에게 사사로이 바친 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자 연산군은 간관들의 거듭된 탄핵에 못 이겨 당시 탄핵한 언관들을 조사하게 하였고 4월 의금부에서 류자광이 굴과 전복(全鰒)을 진상한 것을 비난한 언관들을 조사하여 앞장선 안윤덕(安潤德)은 율(律)이 장(杖) 80에, 김계행(金係幸)· 윤은보(尹殷輔)· 이곤(李坤) 등은 장 70을 논정하여 보고했다. 연산군1506년 1월 1일부로 류자광을 복직시킨다.

1506년 박원종에게서 거사(중종반정) 가담 제의가 들어왔다. 류자광은 성희안 · 박원종 등과 함께 중종 반정에 동참하여 자신이 섬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推戴)하였다. 중종 즉위 직후 정국공신 1등에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으며 9월 26일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으나 10월 10일 왕명으로 영경연사에서 체직(遞職)되었다. 중종 반정의 주동자는 박원종유순정, 성희안으로 반정 이후 실권은 이들에게 넘어갔으나 류자광은 부원군이었고 반정공신들도 류자광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듬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가 충훈부(忠勳府) 당상이 되었다.

 

유배 생활과 죽음

그러나 1507년(중종 1년) 1월 왕실에서 사찰을 건립하려 하자 영가부원군 김수동, 고양부원군 신준, 능천부원군 구수영, 해평부원군 정미수, 연창부원군 김감, 영의정 유순, 좌의정 박원종· 우의정 유순정(柳順汀)· 고양 부원군(高陽府院君) 신준(申浚)· 창산 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공조 판서 권균(權鈞)· 예조 판서 송일(宋軼)· 좌찬성 박안성(朴安性)· 우찬성 노공필(盧公弼), 판의금부사 민효증·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 호조 판서 이계남(李季男)· 형조 판서 이집(李諿)· 이조 판서 장순손, 병조 판서 신윤무, 지의금부사 김응기, 지중추부사 윤금손, 좌참찬 박건, 우참찬(右參贊) 이손(李蓀), 대제학 한사문 · 도총관 박열, 판윤(判尹) 전임(田霖)·이조 참판 유응룡(柳應龍)· 호조 참판 박영문(朴永文)· 예조 참판 김전(金詮)· 형조 참판 신용개(申用漑)· 병조 참판 허집(許輯)· 공조 참판 유빈(柳濱), 대사헌(大司憲) 이계맹(李繼盲),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자건 · 좌윤(左尹) 안윤덕(安潤德)· 우윤(右尹) 하한문(河漢文), 인천군 채수, 서원군 한순, 참찬관 성세순, 특진관 한형윤, 겸지춘추관사 성세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임유겸 · 풍양군(豐陽君) 김무(金碔) · 대사간 안윤손, 대사성(大司成) 이점, 이조 참의(參議) 조계상(曺繼商)· 예조 참의 김안국, 병조 참의 박의영(朴義榮) · 공조 참의 유숭조· 형조 참의 최인(崔潾)· 병조 참지 이세정(李世貞), 부제학 정광필, 도승지 홍숙, 승지 이예견, 좌승지(左承旨) 손중돈, 우승지 안당, 좌부승지 남곤, 우부승지 이과, 동부승지(同副承旨) 심정, 장례원판결사 이자견, 성균관사성 조원기, 사간원사간 김당, 홍문관전한 성몽정, 사헌부집의 이유청, 홍문관응교 김세필, 사헌부장령 이희맹, 홍문관부응교 김극핍, 사헌부지평 윤희인, 홍문관교리 이행, 이조정랑 이사균, 예조정랑 신상, 홍문관수찬 한효원, 형조좌랑 김양진, 성균관전적 유여림, 성균관직강 이자, 홍문관부수찬 홍언필, 규장각대교 윤인경, 봉교 이희증, 김영, 정충량 예문관검열 권벌, 진사 임유겸, 생원 정옥형 등과 합동으로 사찰 건립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월 3일 검소(儉素)와 수신(修身)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들으니, 이 달 초1일에 명하시어, 신을 문채(文彩) 나게 꾸미는 데 단자(段子)를 쓰지 말고 면주(綿紬)로 대신하게 하였다 합니다. 전하의 이 마음은 실로 종사(宗社) 신민 억만 년 한없는 복입니다. 자고(自古)로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 처음에는 검약(儉約)한 덕으로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태평세월이 오래되고 천하에 일이 없게 되면 풍습이 자연히 교만(驕慢)과 사치(奢侈)를 숭상하고 물욕이 서로 마음을 가리게 되어 마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집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여 그만 망하게 되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생각하심이 검박한 덕에서 출발하였고 령(令)하심은 미물에까지 미치십니다. 미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시는데 전하께서 만일 이 마음을 잘 지켜 잃지 않으신다면, 어찌 마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집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시고 실천하시어, 검박한 덕을 힘쓰시고 백년대계를 생각하소서"

1월 4일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대간(臺諫)이 류자광의 대광 임명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07년 2월 김종직(金宗直)의 여당(餘黨)이 비밀리(秘密裏)에 중상(中傷)하려 하니 안심하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며 낙향하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해 2월부터 4월 사이에 대간(臺諫)과 사헌부, 홍문관의 계속된 탄핵으로 관동의 흥양에 유배되었고 양사(兩司)는 류자광을 극형에 처하라고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손자 유승건(柳承乾)· 유승곤(柳承坤)까지 함께 유배되었다. 이후 류자광은 양사(兩司)에서 계속 탄핵받았고 배소(配所)가 해평으로 다시 이배(移配)됐다가 변군으로 재이배(再移配)되었다가 장님이 된 후 1512년 6월 배소에서 병사하였다.

 

예장과 복권

류자광이 죽자 중종은 그가 반정공신이었으므로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되돌려주고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언관들이 계속 그를 탄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12년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권민수(權敏手)는 훈권(勳券)을 도로 주고 또 예장(禮葬)은 부당하다면서 거듭하여 상소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513년 10월 영의정 정광필의 상소로 박탈당했던 호(號) 익대공신도 돌려받았다.

그는 사림파에게 대표할 정도로 전형(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간신(奸臣)으로 비판받았다. 사후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고죽동의 선영하에 부인과 합장(合葬)되었다.

 

사후

조선의 멸망 이후 김종직이 그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점이 감안되어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2006년 11월 25일 영광 류씨 종친회가 주도하여 묘소와 비석이 정비되었다. 2009년 후손들이 신도비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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