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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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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 5월 15일(음력 4월 23일) ~ 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2번째 왕후(王后)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송준길의 딸)의 차녀(次女)이다. 1681년에 외조부 송준길의 친척 아우인 송시열의 후견으로 갓 왕비를 잃은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1689년 음력 5월 2일). 이후 한 달 뒤에 서인의 상징 인물인 송시열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1689년 음력 6월 3일). 5년 후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왕비(王妃)로 복위했다(1694년 음력 4월 12일). 1700년 음력 3월 26일 전후로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는 괴질이 발병해 신체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 아래 투병하다가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망했다. 이 여파로 무고의 옥과 신사환국이 발생하여 그녀의 오랜 연적(戀敵)이었던 희빈 장씨가 자진했으며 가문의 정적(政敵)인 남인·소론이 큰 화를 입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이다.

 

왕비 책봉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로 뽑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명성왕후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張氏: 희빈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원자 정호 사태

1688년 후궁 장씨(소의 장씨)가 아들 윤(昀)(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복위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폐비(민씨)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애초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던 탓이다.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하였던 노론과 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고 선언하여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였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지만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

 

말년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에 35세로 서거한다. 민씨가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11월 7일(음력 10월 8일) 숙종은 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기타

경종실록에 따르면 민씨가 복위된 뒤 왕세자 윤(경종)이 민씨 아래로 입적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자로서 아비의 뒤를 잇는 자는 적모에게 입적한다'는 예를 따른 것으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종이 장씨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민씨에게 줘버렸다는 것은 와전이다. 경종 기사환국 전 원자 명호를 받았을 때에도 당시 정궁이었던 민씨에게 입적되었었다.

 

원자(元子)에게 이미 진호(進號)하여 위로 적후(嫡后)에게 올렸으니, 바로 중궁(中宮)의 아들인 것입니다.  

                                                                                                                                        --<숙종실록 15년 4월 25일(신묘) 10번째 기사 중

 
 

서예의 재주에 능하여 한글로 된 편지서신을 주고 받았다. 궁녀가 화자(話者)로 지어진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 인현왕후전이 영조 말기~정조 초기에 등장해 유행하였다. 한글로 쓴 소설이라 여염에도 쉽게 보급되었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 조성 및 노론에 대한 민심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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