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향학, 고려와 조선의 향교 비교
향교(鄕校)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일명 교궁(校宮)·재궁(齋宮)이며,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을 때에는 향학이라 불렀다. 향교는 지방의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된다.
고려의 향교
고려의 학제(學制)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국립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국자감·동서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국자감을 축소한 학교인 향학(鄕學)을 설치하여 지방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다. 987년(성종 6)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搏士)를 각 1명씩 보내어 교육을 담당케 했고, 992년(성종 11) 지방 주·군에 학교(州學)를 세워 생도에게 공부를 권장하였다.
1127년(인종 5) 3월에 여러 주(州)에 학(學)을 세워서 널리 도(道)를 가르치라는 조서(詔書)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학교의 제도는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여 강당으로서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었으며, 교사는 조교(助敎)라고 하였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하고 학제 또한 퇴폐하니 향교도 역시 쇠미(衰微)한 상태였다. 그 후 충숙왕은 학교를 진흥시키려고 이곡(李穀)으로 하여금 여러 군(郡)을 순력시켜서 향교를 부흥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향교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道)와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목·군·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에는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한국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서양무(東西兩廡)·동서양재(東西兩齋)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兩舍)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內舍生)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랑생(增廣生)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훈도(訓導) 각 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었으며, 또 교예(校隸)가 속하고 있었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그 공수(公需)를 위하여 정부에서 학전(學田) 7결 5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으나,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매수 등에 의한 많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다. 향교 입적자에게만 과거 응시의 자격이 주어졌으며, 소과에 입격하면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을 나갈 수 있었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었다.
이후 교육제도의 확립에 따라 각종 교육기관은 정비되었으며, 향교는 1911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문묘직원(文廟直員)을 명예직으로 두어 부윤 혹은 군수의 감독하에 두고 문묘를 지키고 서무(庶務)에 종사케 하였다. 학전, 지방 유림의 구림(鳩林) 등 향교재산은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의 소관으로 1900년(융희 4) 4월에 향교 재산관리규정을 정하고 부윤·군수로 하여금 정리케 하고 그 수입은 부·군내의 공립학교 또는 지정하는 학교의 경비 또는 문묘의 수리·향사비로 충당케 하였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향교의 총수 335, 소관 토지 48만 평이었다. 그 후 재산 관리규정은 폐기되어 공립학교의 경비에 사용되지 않고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 사업의 시설에만 충당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