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흑도회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하다.
박열(朴烈, 박렬,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이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1946년 10월 ~ 1949년 4월)을 지냈다.
학창시절
경상북도 문경에서 박영수(朴英洙)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상주시에 있던 함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경기고등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수학했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를 다녔다.
무정부주의자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1920년 1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노동자 사회의 상부상조를 표면 상의 목적으로 하는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의열단, 흑우회 등을 조직했다. 박열은 흑도회라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에 가담한 아나키즘 신봉자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직접 행동의 기회를 노리던 중, 그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몇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광복 이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풀려나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이때 저서로 《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했다.
김구가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편지를 보내, 이승만과 김구의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2월 ~ 6월까지 김구의 부탁으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발굴 봉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했다. 그 후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1948년 재정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납북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했다가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북에서 구체적인 활동 자료는 알 수 없다. 1974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명단에 이름이 있으나 동 단체는 대남선전과 통일전략에 납북인사를 활용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들을 대부분 비자발적으로 동원했던 단체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 터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2012년 10월 9일에 개관되었으며,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에 먼저 자리잡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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