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립 , 험천전투에서 칠순에 가까운 노장 최진립 전사하다.
최진립(崔震立, 1568년 ~ 1636년)은 조선의 무신이다.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68년 경주에서 최신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하였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되었고,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 여도만호(呂島萬戶)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마량첨사(馬梁僉使), 경상우후(慶尙虞侯)에 제수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정돈하였다. 1607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를 지내고, 1614년에 경원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청하나 응하지 않았다 갑산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사면되어 가덕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복직하였고, 1626년에는 경흥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지냈다. 1630년(인조 8년) 전라좌수사를 거쳐 경기수사에 올랐으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1632년에는 교동부사가 되었고, 1633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를 거쳐 덕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634년인조 12년)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험천 전투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향했던 충청도 근왕군과 청군이 벌인 전투로, 사기가 낮았던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정세규는 퇴각하였다.
근왕의 명을 받은 충청도 감사 정세규는 칠순에 가까운 노장 최진립과 함께 8,000명의 근왕병을 조직하여 진군하였다. 근왕군은 남한산성으로 진군 중이라는 신호를 알리는 불화살을 쏜 뒤 험천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청 태종의 매부이자 청군의 명장인 양고리가 조선군을 기습하였다.
사기가 낮았던 근왕군은 갑작스러운 청군의 기습에 전의를 상실하여 대거 탈영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퇴로가 막혔고 뒤로는 절벽이 가로막았으므로 다수의 병력이 낙사했다. 이민진과 김홍익의 의병들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나 탈영하는 근왕군에 밀쳐져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낙사했다. 난전 중에 최진립이 전사하고 영장 권정길의 아우인 권임길 또한 전사했다. 의병장 김홍익 또한 전사하고 이민진은 포로로 붙잡힌 뒤 항거하다 처형되었다.
정세규는 전투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절벽으로 몸을 던졌으나, 군사들에게 구출되어 수원으로 퇴각하였다. 정세규를 제외한 다수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병력의 대부분을 잃는 등 이 전투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그러나 정세규는 이때의 충성심을 인정받아 패전의 죄를 면죄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공주 영장으로 감사 정세규의 좌영장으로 출진하여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사후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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