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의 전개 과정,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키다.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또는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 지린 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여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하게 된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실패로 만들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여 한인 독립군들은 러시아로 일부 건너가는 등 만주 독립군벌은 해체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전투 초반
첩보원으로부터 왜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은 이범석은 산꼭대기에 올라 망원경으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이동을 지켜봤다. 정탐군을 보내 보병, 포병, 기병, 공병을 합친 병력이 1만 명으로 일본 파병군의 선발대라고 하였다. 이범석은 근처 한인 교포와 사냥꾼을 모은 뒤 마을의 부녀자와 노인들에게는 독립군은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총을 가진 병사 수가 적어서 몇안되고 굶주려 지쳤다 고 증언하도록 사전에 지시했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김좌진 이범석 등은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 선발대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백운평에 당도한 김좌진은 지형조건을 이용하기로 하고, 비전투원으로 구성된 제1제대는 후방에, 이범석이 지휘하는 제2제대는 최전선에 배치하고 일본군 추격대가 매복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백운평 전투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의 또다른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매복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진입했다. 90여명의 일본군 야스가와부대의 전위대 전병력이 백운평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오전 9시경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독립군이 은폐하고 있는 정확한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일본군은 표적이 보이지 않는 산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댔지만 독립군은 이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여 사격을 가했다. 마침내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장병의 시체를 버리고 도망쳤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야마다 토벌대대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공격하려 했으나, 골짜기 아래에서 일본군의 사격은 불편했고, 한편 높은 고지 위에서 사격하는 한인 독립군은 유리하였다.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은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패주했다.
이후 중무장한 야마다 부대의 주력부대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찾지 못했다. 고지대에 오른데다가 지형, 지물에 은폐한 독립군을 아래에서 찾아서 쏴야 했던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하였다.
임정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에 따르면 “맹렬한 급사격을 가한 지 약 20여 분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고 전하고 있다. 이범석은 나머지 일본군 퇴각자를 추격하였으나,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신호를 보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화룡현 내 갑산촌(甲山村)으로 퇴각시키게 하였다.
이도구 전투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김좌진 부대가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 4백여 명과 교전이 거의 끝나가고 퇴각을 준비할 무렵까지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을 만나 고전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오후, 일본군이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포위해 들어왔다. 이에 독립군은 10월 22일 새벽까지 완강한 항전을 벌였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끝내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백여 명을 사살하고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집중 공격,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갑산촌 전투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매복한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완전히 엄폐되어 있는 독립군의 반격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200~1,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이도구 내 다른 숙영지로 패주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의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甲山村) 부근으로 이동해 10월 22일 새벽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충천했다. 청산리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일본군의 실수
일본군 동지대는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김좌진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삼림지대로 들어왔다. 동지대는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남완루구와 북완루구로 병력을 나누었는데 독립군은 먼저 남완루구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홍범도가 이끄는 본진은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분견대는 예비로 매복을 시켜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분견대의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분견대가 빠져나가자, 반대편에서 홍범도부대 분견대를 공격하던 일본군을 발견한다.
북완루구의 일본군은 독립군에 응사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는 “적이 적군을 맹사(猛射)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적의 일대는 전멸에 빠졌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었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공식 보고서가 아닌 독립신문에서는 논평을 내고 일본군의 오인 사격을 조롱하였다.
10월 18일에도 일본군은 자국 군끼리 오인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박은식은 18일의 일본군이 자국 군끼리 싸우는 것을 증언하였다. 우리 독립군이 10월 16일 삼도구에 도착하자 10월 18일에 일본군 3개 대대가 함경북도 무산으로부터 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청산리로 들어가 요지를 차지하고 숲 속에 잠복하였다. 적이 과연 대대 병력으로 뒤쫓아 왔다. 독립군은 기습적으로 뛰쳐나와 맹렬하게 총을 쏘았다. 적은 450여 명이 즉사하고 부상자도 60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속 부대 또한 두려워서 퇴각하였다. 박은식에 의하면 '아군도 비록 승리는 거두었으나 병력의 부족으로 대적하기 어려워 즉각 산골짜기 사이를 통해서 이도구로 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독립군들은 밤중에 길을 잃어 수십 리를 돌아, 곧바로 도착하지 못하였다.
10월 18일 밤중, 일본군은 우리 군이 분명히 이도구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가서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좌우를 순회하다가 갑자기 자기네끼리 마주치고는 이를 우리 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발포하여 사망자가 180 명, 부상자가 70 명이나 되었다. 아군(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다.
박은식은 청산리에서 일본군이 실수를 한 다른 기록도 남겼다. 1920년 10월 21일 밤부터 10월 22일 새벽까지의 이도구에서 홍범도군과 교전한 일본군 역시 자신들 끼리 서로 교전하여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들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총을 쏘아대기도 하면서 허둥댔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박은식 역시 현장 목격담을 듣고 이를 증언하였다. '적(일본군)의 구원부대가 도착하여, 아군(독립군 연합부대)이 이미 퇴각한 줄도 모르고 포위하여 불을 놓았다. 남북 양방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대를 잠복시켜 엿보도록 하였지만 아군의 소리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저들 양 방향의 일본 매복 병사들이 서로 알리지도 않고 길을 나누어 수색하다가 또다시 자기네끼리 서로 충돌하여 사상자가 2백 명이나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박은식은 일본군이 자기들 끼리 싸우다가 전사하자, 이를 숨어서 지켜보던 한국인 독립군이 이들의 무기를 노획해갔다고 한다.
아군의 노획물은 속사포 5문, 기관총 30정, 탄알 5천 발, 말 20필, 군도(군용 칼) 20자루, 쌍안경 5대, 손목시계 20개, 군용지도 6매 등이었다. ---- 박은식
박은식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인 독립군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죽은 일본군의 손목에서 손목시계 까지 빼갔다.'고 한다.
다만, 청산리 전투 때는 같은 화룡현 관내에서 벌어졌던 봉오동 전투 때와는 달리 기상 이변이 없었고 지형이나 주변 환경의 악영향이 없었는데도 일본군 부대는 실수로 자국 군끼리 교전을 했다. 그러나 후에 일본군은 군복을 바꾸지는 않고 관계자들을 문책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일본군이 아군을 독립군으로 착각하고 오인사격하다가 자멸한 것은 박은식의 증언처럼 '아군(독립군)의 제복, 제모가 저들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참고하여, 자신들이 마련한 군 자금 중 일부로 일본군 복장과 계급장, 일본군이 쏘는 소총 등을 계속 구입하여 일본군으로 위장하여 움직이기도 했다.
천수평 전투
10월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 2지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천막치고, 숙영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동이 트기 전 김좌진부대의 제1, 2지대는 그 곳으로 이동해 주변 고지에 올라 일본군 기병중대를 포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아즈마 중대원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1920년 10월 22일 아침에는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 또다시 매복작전에 걸린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독립신문 제88호는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함경도 이주민들이 개척한 어랑촌에 병력을 증파했다.
어랑촌 협공 작전
10월 22일 오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다. 10월 22일오전 9시 300여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의 일부인 기병대대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그 날 저녁 7시 경까지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촌락의 아낙네들이 입에 넣어주는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야산 고지로 이동시켜 전열을 가가듬었다. 그러나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이 포위 공격을 해왔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가 이를 보고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홍범도 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부터 싸움에 가세,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그 틈을 타서 김좌진 부대는 탈출에 성공한다.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이범석은 후일 자신의 자서전 우둥불에서 “나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가 났다“고 회상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1,700여명의 독립군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1,000여명의 일본군의 교전 중 측면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독립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소규모 분대로 나누어 이동하였다. 날이 저물자 북로군정서와 대한군북로독군부군은 추격하는 일본군 수삭대를 따돌리고 신속히 어랑촌을 빠져나갔다.
만록구 전투
10월 21일부터 10월 23일 화룡현내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 독립군 전사자는 20여명이었으나 일본군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23일에는 이범석이 오래된 말 똥 다량을 채취해서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일대에 뿌려 두었다. 이범석 일행이 이끄는 부대가 오래된 말똥을 뿌린 뒤, 이 곳을 지나가던 일본군의 척후병이 나타나 말똥을 채취하여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일본군 주력부대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평지에서의 교전은 불리하여 10월 23일부터 이틀 간 만록구 고지에서 백병전을 펼쳐 겨우 일본군을 퇴각시켰다.
고동하 전투와 전투 후반
10월 23일부터 독립군 연합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홍범도 부대의 행방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10월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계곡의 흔적을 발견하고, 인근에서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 일부는 이미 공격을 대비해 고동하 계곡 사방의 산정에 매복 중이었다. 밤중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전열을 겨우 수습한 뒤 일본군과 교전, 신속히 대피하였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고동하 계곡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은 산중으로 올라가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다시 퇴각했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0월 24일에는 북로군정서 예하 한 부대가 천보산 부근에 있던 조선주둔 일본군 파견부대를 습격하였다가 퇴각하기도 했다.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벌어진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간도 왕청현에서 백두산 산록 사이에서 벌어진 10여 회의 전투에서 한국인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다.
전사상자
6일간에 걸쳐 싸운 끝에 일본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 측은 당시 일본군 전상자를 전사자 1,200명, 부상자 3,300여 명 정도로 추산한다. 이때 한국인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장인 가노 노부테루 일본군 육군 대령 외에 대대장 2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한국측 자료도 학자 연구와 자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으나, 대략 일본군 사상자 1천~3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측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 신문에는 청산리 전투에 의한 보도로 '아군 가노 연대장이 전사하고, 대대장 2명, 중대장 5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전사자 9백여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일본 측에서는 최소 하사관 이하 전사자를 9백명에서 1천 명 정도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일본일본군 기병연대장 전사자 목록에서 가노 노보테루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일본군 27기병 연대의 자료를 보면 가노 노보테루는 1922년 까지 군생활을 한것으로 나온다. 또한 간도출병사의 기록에도 1920년 11월 중순에 가노 대좌가 이끄는 토벌대가 참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정 요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사학자 백암 박은식에 의하면 일본 측이 잡은 일본군 전사자 수치는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에 의한 것이라 한다. 박은식은 또한 현지 중국인 공공기관에서 조사한 수치도 자신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해 두었다.
박은식에 의하면 '우리 사령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적군(일본군)의 사상자가 천6백여 명이었고, 중국 관청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3백여 명이었다.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이도구 전투들에서 카노 연대장,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군병 사망자가 9백여 명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박은식은 또 '청산리 전투에서의 일본인 사망자는 아직 확인된 보고가 없으나, 저들 참사자들의 머리를 실어 운송해온 것이 차로 16량이나 된다고 한다. 이 또한 많은 목격자들이 전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일본 영사관측의 비밀 보고서는 그대로 일본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후대의 한국인 사학자 심상룡은 일본 영사관이 왜곡한 자료를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목격자들이 박은식에게 들려주기로는 일본군은 전사자들의 시신만 대형 트럭으로 16대를 운구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측의 비밀보고서는 실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있다.
독립군 연합부대의 전사자는 1백 30명이었다. 그밖에 실종자는 2백여 명이었고, 부상자는 90여 명 정도였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에 종군하였던 안정근의 보고에 의하면 10월 23-25일간 쌍방의 피해가 300여 명이라 한다.
장세윤은 안정근의 보고를 토대로 일본군의 사상자는 400-500명 선이고. 독립군도 이에 맞먹는 피해를 입었을것이라 추산하였다.
만주 의병단체의 해산
그러나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경신참변(庚申慘變)이 그것이다.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다. 이로서 만주의 한인 독립군 결집체와 연대는 해체되고 만다. 그 후 만주에서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 활동하다가 한족총연합회와 국민부로 개편되고 한족총연합회는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북만주와 동만주에서,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만들어 남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1930년대 중엽 일제의 공세에 밀려 중국 본토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청산리 전투에는 비전투원을 도와준 현지 한인 주민들의 공도 있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잡지 못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와 간도, 요양 등지로 이주한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는데, 이를 간도 참변이라고 한다.
1921년 1월 26일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이다. 이범석 등도 이들을 따라갔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물 주 자유시(알렉셰프스크)란 곳으로 옮겨갔다.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측의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죄다 반납한 채였다.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한편 김좌진은 자유시로 가지 않고 만주로 되돌아와 적화방지단을 만들어 반공의 일선에 섰다.
이범석의 왜곡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싸운 것이며, 김좌진과 이범석이 그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 단독의 전과라고 알려진 것은 전투 참가자 중 한 사람인 이범석이 《한국의 분노》라는 회고록에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우둥불》이라는 다른 회고록을 다시 발표, '홍범도 부대가 전투 직전 도망갔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 변명 또한 왜곡으로 밝혀졌다.[18] 이는 전투 초반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타 독립군 부대들이 피전론으로 전술적 후퇴를 하였으나 북로군정서는 물러선다 하더라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보고,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벽오동전투 승전후 전투를 피하던 홍범도 부대와 다른 독립군 부대 역시 어랑촌 결전부터 가담하여 함께싸웠다.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함께 싸웠으며, 그 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도 특히 눈부셨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연합으로 나와 있다. 임정 발표에 의하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병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평가
봉오동, 청산리 전투 패전후 일제는 약 두 달 간 독립군의 근거지라고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의 학교가 불에 탔다. 이를 간도 학살 사건 또는 경신참변이라고 부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완린 작가는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이광수는 청산리 전투가 오히려 간도 참변을 야기했다는 비평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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