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중종은 조광조의 시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다.
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 )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출생과 유년기
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공신 이기도 했다.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의 가문인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욕은 꺾을수 없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당시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어린 소년이었으나 영특한 재능을 알아본 김굉필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이 인연으로 그는 김굉필과 사제지간이 된다.
성리학 수학
그는 김종직(金宗直)을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김굉필로부터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한사람이 된다. 그러나 김종직의 제자이자 스승 김굉필의 친구들 중에는 남곤도 있었는데, 남곤은 후에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서게 된다. 또한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대하되 의롭지 못한 자, 불의와 쉽게 타협하는 자들을 멀리하였고,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려고 스스로 노력하였다.
이후 김굉필의 배소가 옮겨지게 되면서 그와 이별,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로 사사된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이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이어 터진 직후라 김굉필의 제자이고 김종직의 말씀과 성리학에 빠진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피하였으며,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며 조롱하거나 '화태'(禍胎, 화를 잉태한 이라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비난과 비아냥, 조롱에 굴하지 않고 성리학과 사물 연구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 몰두하게 되면서 친구들과도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행동을 절제하고 인내하려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청소년기
조광조는 공자, 주자와 포은 정몽주를 인생의 모델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을 세상의 사표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는 사소한 예의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꾸준히 노력했고, 총명하였으며, 짧은 만남 후 스승 김굉필과 이별한 뒤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가슴속에 새겼다.
모르는 점이 있으면 답을 얻을 때까지 연구·독서하였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서 묻거나 선배 사림인사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남곤과의 인연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조광조는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남곤도 있었다. 청년기의 남곤은 같은 김종직 학파 사람으로서 조광조와 친분이 있었다. 산책을 하던 길에 조광조는 지나가던 여인의 모습을 보고 계속 뒤돌아봤고 남곤은 옆으로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앞서갔다. 조광조는 지나는 길에 여인들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 조광조는 어머니 여흥 민씨에게 산책시 여인의 모습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자책하였으나, 조광조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된다.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반드시 있다. 남곤은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인가?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내가 너를 어찌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는가?"
이후 조광조의 어머니 민씨는 아들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충고했고, 아들이 남곤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집도 이사하였다 한다.
성균관 수학시절
19세에 부친을 여의고 3년상을 마쳤다. 부친을 일찍 여의었으나 홀어머니 민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면서 한번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자 김종직의 다른 문하생들과도 찾아다니며 정치와 시국을 논하며, 사물의 이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와 교류하던 선배들 중 한 동리에 살던 남곤의 인물됨됨이를 우려스럽게 본 그의 모친은 집을 멀리 이사하여 남곤을 피하게 한다. 1507년(중종 1년) 윤1월 박경(朴耕)과 문서귀 등이 반정공신인 유자광(柳子光), 박원종(朴元宗) 등을 비방한 일에 연루되어 공초를 받은 뒤 풀려났다.
1510년(중종 5) 소과인 진사시에 장원 중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 성균관에 들어가 경서를 강독할 때 《중용(中庸)》을 강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성균관에 유숭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중, 1511년 성균관 사경(司經) 황여헌(黃汝獻)의 천거를 받았다. 이후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관직에 천거하게 되자 그는 동료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천거를 두고 반대여론이 나오면서 성사되지 못한다.
성균관에서 강의하던 도학정치가 유숭조는 한때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정여창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사림파 학자들의 정계 진출을 후원해주었다. 동료들의 천거와 유숭조 등의 적극 추천이 있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과거 급제
1515년(중종 1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직에 낙점되었으나, 그해 6월 이조판서 안당(安瑭), 남곤 등의 추천으로 선무랑(宣務郞)으로 발탁되었다. 그의 거침없는 논리와 열정에 많은 관료들이 탄복하였다. 곧이어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관직에 오른 뒤에도 그는 사서삼경과 주자학 서적에 대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기방 출입은 자제하였다. 그러나 과거를 보아 떳떳이 벼슬에 오를 것을 다짐하던 차 마침 그해 8월 22일에 알성시(謁聖試)가 있어, 그 해의 알성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중종이 성균관을 찾아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중종은 '금일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겪으며 이상적인 정치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아야 된다'는 답안을 올리니 중종이 그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였다.
세상에는 성함과 쇠함이 있으나 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예로서 사람들의 뜻을 이끌고 즐거움으로 사람들의 기운을 순화시킨 다음, 바른 정치로 그것을 행한다면 정치와 교화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천지가 밝아질 것이며 천지의 기와 어울려 하나가 돼 음양의 기운을 뿜어 대니 모든 초목이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성인이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기만 하는 곳의 사람들도 그 덕에 감화되는데 성인이 머무는 곳에서 사람들이 입는 감화는 측량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그 도를 얻으면 기강이란 힘써 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게 되며 애써 법도를 정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듣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해지는 것이다.
성균관의 문묘에서 치러진 알성시의 답안에서 그는 임금을 타이르는 듯한 답을 제시했다. 그의 답에 시험관들은 탄복하였고, 이를 직접 읽어 본 중종은 그를 친히 만나 세상을 구할 방법을 물었다. 그는 임금이 스스로 도와 덕치로서 다스리고, 먼저 솔선수범하여 수기치인할 것을 강조했다.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서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 마음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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