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세종의 왕비,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10월 12일 (음력 9월 28일) ~ 1446년 4월 19일 (음력 3월 24일))는 조선 세종의 왕비이다. 별호는 공비(恭妃),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다.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靑川府院君 安孝公 沈溫)의 장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집안이 멸문당한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마찬가지로, 소헌왕후 또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을 잃는다.
특히 남편 세종대왕을 이해하고 내조를 했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이는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이다.
일생
1395년 문하시중 심덕부의 아들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과 그 부인인 순흥 안씨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조선 태종 8년인 1408년 당시 충녕군(忠寧君)이었던 세종과 혼례를 올리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그녀가 충녕대군의 배필이 된 이유는 숙모가 태종의 누나인 경선공주인 까닭이 컸다.
태종 17년인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고, 태종 18년인 1418년 음력 6월, 남편 충녕대군이(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이 되었으며, 그해 음력 8월 충녕대군이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중궁(中宮)이 되어 공비(恭妃)라는 책봉명을 받았다. 그 해, 아버지 심온과 숙부 심정이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당하였고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친족들은 관비가 되었다. 한편, 소헌왕후에 대해서도 폐비(廢妃)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크고, 왕자를 2명이나 출산하였고 당시에도 안평대군을 임신중이었기에 폐비되지 않았다. 1426년, 모친 안씨와 가족들은 천안에서 제명되고 직첩이 복원된다.
세종 16년 1432년, 국초에 사용하던 왕비와 세자빈에게 미칭을 붙이던 제도를 폐지하면서 그도 공비에서 왕비(王妃)로 개봉되었다.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총 8남 2녀를 출산했는데, 이 중 3명의 자녀는 소헌왕후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다. 1녀 정소공주는 1424년 13세 나이로 사망한다. 1444년에는 모친 안씨가 사망하고 몇달 뒤,1444년 12월 7일 5남 광평대군이 사망한다. 5남 광평대군이 사망하기가 무섭게 약 1달뒤, 1445년 1월 16일, 7남 평원대군이 사망한다. 이후 소헌왕후가 1446년 사망하는데, 잇달아 떠난 자식들과 어머니의 죽음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세종 28년인 1446년 52세로 수양대군의 저택에서 승하하였고, 아들 문종대에 선인제성(宣仁齊聖)의 존호가 올려졌다. 능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英陵)이며, 남편 세종과 합장되었다.
남편 세종과의 관계
세종의 세자 책봉 전, 소헌왕후가 들어오고 나갈 때 반드시 일어나서 맞이했다고 한다. 1422년,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세종은 신하들에게 여러 차례의 불공을 명하거나, 육선을 올리게 하고 병에 차도가 보이자 의원과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한다. 1426년, 세종은 직첩이 복원된 모친 안씨와 소헌왕후를 배려해, 소헌왕후가 모친 안씨와 만나 연회를 베풀 수 있도록 한다. 1446년 3월, 소헌왕후가 병이 들자 세종이 수시로 찾아와 보았다고 한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자, 차기 왕이 부모의 합장릉을 명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합장릉을 명하였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평가
소헌왕후는 남편은 물론 아들들까지 상당히 잘 둔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남편은 세종이고, 장남은 문종, 차남은 세조, 삼남은 안평대군이다. 또한 성격이 워낙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기강이 엄정하다고 하였다. 특히 세종을 깊게 이해하며 내조하고, 내명부를 잘 통솔하였다. 그 당시 소헌왕후의 내명부는 조선에서는 가장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세종이 조정에서 소헌왕후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후일에 후덕한 성품의 심씨의 내조가 세종이 최고의 성군으로 되는 기반이 된 것은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소헌왕후는 남편 세종이 조선의 이상 군주의 본보기처럼 조선 왕비 이상의 롤모델이어서 조선 시대에 존경을 받았다. 심씨가 금성대군을 임신중일 때 세종이 외지로 나간 사이 궁궐에 불이 나 화재 진압을 직접 주도하였다고 한다.
안정적인 내명부
내명부에 대한 안정적인 지도력은 후궁의 문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소헌왕후는 총애받는 후궁은 오히려 더 대접하였고 그들을 신뢰해 여러 자녀들을 후궁들에게 양육하도록 한다. 8남 2녀 중 막내인 영응대군의 양육은 신빈에게, 6남 금성대군의 양육은 태종 후궁 의빈에게, 문종의 자녀인 경혜공주와 단종의 양육은 혜빈에게 맡긴다. 또한 본인의 속마음은 어떠했을지 잘 모르지만, 질투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으로 일찍이 태종과 세종에게 칭찬을 받았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는데,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嬪媵)을 예(禮)로 접대하고, 아래로 궁인(宮人)이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후궁(後宮)이 나아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용납하는 것을 가하며, 만일 상감께서 총애하신 자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주어, 지극한 정[至情]이 사이가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이 또한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길러서 자기 소생보다 낫게 하였으며, 또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이 또한 지성껏 받들어 순(順)히 하여 감히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빈(嬪)·잉(媵)이하가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부모 대접하듯이 하였다. 서출(庶出)의 자식 보기를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어선(御膳)이 나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보아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국모(國母)로 있은 지 29년 동안에 경계(儆戒)의 도움이 있고, 연안(宴安)의 사사(私事)가 없었으며,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절대로 바깥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록 궁중에서 날마다 쓰는 자디잔 일이라도 반드시 위로 들리어 감히 임의로 하는 일이 없었다. -세종 112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6월 6일(임인) 2번째기사
하지만 소헌왕후는 마냥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라 강단있는 성품도 있었다. 세종 21년(1439) 임영대군이 궁녀들과 사통을 하여 세종이 그 관련자들을 벌 주고 임영대군의 직첩까지 빼앗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일을 임금이 알게 된 것은 소헌왕후를 통해서였다. 평소 후궁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동태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였던 소헌왕후는 임영대군의 유모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전달받았고 이를 임금에게 전달한다. 이로 인해 임영대군은 세종에게 벌을 받는다. 소헌왕후는 그러한 비행이 친자식의 소행이라고 하여 눈감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문종의 폐세자빈, 폐 휘빈 김씨와 폐 순빈 봉씨의 만행들도 소헌왕후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를 통해 밝혀졌다. 평소 소헌왕후의 내명부에 대한 통솔력에 인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강단있는 성품과 통솔력 있는 소헌왕후가 있었기에 조선 역사상 가장 안정했던 내명부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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