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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원나라의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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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원나라의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1236년 4월 3일 (음력 2월 26일) ~ 1308년 7월 30일 (음력 7월 13일) )은 고려 제25대 국왕(재위: 1274년 ~ 1298년, 복위:1299년 ~ 1308년)이다. 는 거(昛), 초명은 심(諶)·춘(賰), 원에서 내린 시호충렬왕(忠烈王)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광문선덕경효대왕(光文宣德景孝大王)이다. 원종과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의 맏아들이다.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군주들은 원나라의 황녀나 종실의 딸을 정비 또는 후궁으로 맞이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제후국)이 되었다. 그의 직계는 충목왕, 충정왕, 창왕의 죽음으로 단절되지만 34대 군주 공양왕은 모계를 통해 진외고조부가 된다.

고려왕조에서 최초로 양위하였다가 복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흔히 몽골에서 내린 시호를 처음 사용한 고려의 군주로 알려졌지만 몽골 제국이 하사한 시호를 최초로 받은 왕은 그의 할아버지인 고종이었다.

 

생애

그는 원종의 맏아들이며 1260년(원종 1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갔으며,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변발·호복 등 몽골 풍속에 따랐다. 그 때문에 조정 신하들마저 이 풍습을 따랐고, 후엔 백성들까지 몽골의 풍습을 따른다. 이때 승려 일연(一然)은 충렬 11년인 1285년삼국유사》를 만들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혼인한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제후국이 되었다. 왕위에 즉위한 그해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

1277년(충렬왕 3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1298년 (충렬왕 24년) 세자(충선)에게 선위하고 광문선덕(光文宣德)의 존호를 받아 태상왕이 되었다.

 

관직 용어 격하

충렬왕 2년 3월에 원나라 관리 다루가치가 충렬왕에게 말하기를, "선지(宣旨)라고 일컫고, 짐(朕)·사(赦)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참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지적을 하자 충렬왕이 고려 관리 중찬 김방경과 좌승선 박항에게 이 지적을 해명하라고 해 "감히 참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께서 서로 전하여 오던 옛날 법을 따른 것뿐입니다."라고 해명하였다. 이 날 이후 고려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 되었다.

 

평가

재위 중 자주 원나라에 내왕하면서 풍습과 제반 문물제도를 받아들였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경학과 사학의 진흥에 힘썼다. 또 원나라의 속방(屬邦)에 맞게 관제를 격하하였고, 지배를 받았다. 원의 풍속이 많이 들어왔으며, 또한 왕비와 그 일족이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고려 농민은 유민(流民)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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