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폐위된 후 다시 복귀한 군주, 만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전념하다.
충선왕(忠宣王, 1275년 10월 20일 (음력 9월 30일) ~ 1325년 6월 23일 (음력 5월 13일)은 고려 제26대 국왕(재위: 1298년, 복위: 1308년~1313년)이다. 초휘는 원(願), 휘는 장(璋), 자는 중앙(仲昻),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선왕(忠宣王)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선효대왕(宣孝大王)이다. 몽골식 이름은 이지르부카( 한국 한자: 益知禮普花 익지예보화)이며, 정비(正妃)는 계국대장공주이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즉위하였다가 폐위된 후 다시 복귀한 군주이기도 하다. 생애 후반에는 귀국을 기피하고 원나라에 체류하며 만권당을 세워 독서와 학문 연구, 서화 그리기 등에 전념하기도 했다.
즉위 이전
1277년(충렬왕 3년) 세자로 책봉되고,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년)에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카말라(甘麻刺)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원도에서 혼사를 올렸다.
앞서 서원후 왕영·홍문계(洪文系)·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특히 왕영의 딸 정비 왕씨는 1287년(충렬왕 13년),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사정을 들은 세자의 요청으로 공녀 차출을 면하였으며, 1289년 자신의 비로 들였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내총(內寵)을 질투하는 자들의 소치(所致)라 하여 당시 부왕(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후궁 무비(無比, 백야단)를 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를 넘겨줄 뜻을 원나라에 알렸다.
즉위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
충선왕이 왕위를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환한 뒤 원나라로 간 뒤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송린·석천보 등이 그를 모함하여 두 부자를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의 재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오히려 처형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서울에 머물면서 후에 원 무종이 되는 회령왕(懷寧王) 카이산(海山)과 원 인종이 되는 태자 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達)와 친하게 지냈다.
1307년 원나라의 성종이 죽자 왕위 계승이 실력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충선왕은 무종을 옹립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써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 에 즉위하였으며,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왕에 복귀하여 다시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으나 오래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귀환을 꺼렸다. 이 와중에 세자 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그를 살해한다.
아들 강릉대군 도(江陵大君 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왕고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전위(傳位)하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 결여, 원황실의 우대 등에도 이유도 있고, 충선왕의 본성이 담박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다.
그 무렵 원나라 연경에 만권당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모으고, 고려에서 이제현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고려 문화 수입에 힘을 썼다.
개혁
충선왕의 개혁 정치(忠宣王- 改革 政治)는 반원파를 중심으로 한 충선왕의 정치이다.
1차 개혁
그는 즉위 직후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펼쳐냈고, 개혁은 신하들의 대환영을 받는다.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포상한다.
공신의 자손에겐 공신전을 수여한다.
내시의 등급을 상승시킨다.
실력을 위주로 하여, 임명과 파면 및 승진을 결정하킨다.
신분에 상관 없이 인물을 등용한다.
무신정권 이후 급격히 기운 무신들의 권세를 상승시킨다.
2차 개혁
그는 복위하여 개혁을 했다. 그러나 정세가 바뀐 후여서 개혁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세금을 낮춰 걷는다.
귀족의 횡포를 엄단한다.
실력 있는 인재를 등용한다.
생애 후반
한편 충선왕의 개혁정치로 말미암아 홍복원의 손자인 홍중희, 홍중경 등이 기득권을 잃게 되자, 이들 홍씨들은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입성론을 펼쳤다. 입성론(立省論)은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 행중서성)으로 삼아달라는 주장을 가리킨다.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인 방망고태(方忙古台)에 의해 좌절된다. 방망고태는 흥성궁興聖宮)에서 원 무종의 모후인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를 섬기고 있었는데, 황태후에게 "홍중희가 고려에서 도망 온 백성인 주제에 감히 방자하게 거짓말을 해 본국을 전복하려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한데 어찌 되레 왕과 대질해 시비를 가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니 황태후는 진실을 알아차리고 황제에게 말해 중서성에 칙명을 내려서 양자가 대면해 시비를 가리는 일 없이 홍중희만 장형을 가해 장기간 조주(潮州)로 유배보내게 했다. 그래서 충선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하자마자 좌초하게 되며, 또한 충선왕은 강제 폐위되었고, 고려 왕위는 충선왕의 장자 강릉대군에게, 심양 왕위는 당시 충선왕의 조카이며 태자였던 연안군 왕고(延安君王暠)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 뒤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며, 특히 고려 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탈탈불화(脫脫不花)가 후계자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는 멸망한다.
유배와 석방, 죽음
원나라의 인종이 죽자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 백안독고사(伯顏禿古思)의 참소로 토번(지금의 티베트) 땅에 유배되었다가 매부(妹夫)인 원 태정제가 즉위하자 유배가 풀려 원나라 대도에 돌아와 2년 후에 객사하였다.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덕릉(德陵)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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