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창,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 종성에서 사망하다.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 ∼ 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생애 초반
일두 정여창은 1450년 음력 5월 5일에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정복주(鄭復周)이고 아버지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정육을(鄭六乙)과,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인 어머니 경주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판종부시사 정지의(鄭之義)의 증손으로, 그의 고조부 정유는 병조판서 정익의 동생으로, 할아버지 정복주는 세조 때의 재상 정인지와 8촌으로 당내간이었다. 아버지 육을은 세조의 부마 정현조, 하남군 정숭조 등과 10촌간이었다.
고려 문하시중 정도정의 17대손으로 할아버지 복주(復周)는 조선 태종 때에 삼사(三司)를 지내고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려문(孝子旌閭門)을 받았으며, 아버지 정육을은 이시애의 난 당시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하여 이시애 군과 결사항전하던 중 전사하고, 사후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의 녹훈(錄勳)을 받고 한성부좌윤에 추증된다.
수학과 청년기
8세 때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부임한 아버지 정육을을 따라 수행하니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집안을 창성하게 할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일찍이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1달간 전장터를 떠돌며 그 시신을 찾아서 예장하자 세조가 정육을의 공을 가상히 여겨 정여창에게 아버지의 직책을 제수하였으나 고사하였다.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학문을 익히다가,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독특한 학문과 언행, 덕행 등으로 선비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굉필, 송석충, 김일손, 정광필 등과 주로 친하게 지내며 교유하였다.
관료 생활
22세 때부터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1490년(성종 21) 학행으로 출사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그해 가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당시 세자사부의 한사람으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그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성종 25년(1494년)에 외직인 경상도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유배와 최후
사림파들의 평소 폐비 윤씨 복위 반대를 못마땅히 여긴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사림파를 일망타진하려 한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일손 등의 사초가 문제되어, 국왕 연산군의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청년들과 학동들을 데려다가 성리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을 만나 한성부와 시국담론,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1504년 종성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4세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자 문인들과 유림 동료 친지들은 함경도 종성에 가 두 달에 걸쳐 그의 시신을 고향 함양군까지 옮겨와 장사하였다. 장지는 남계서원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하였다.
사후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승안동에 안장되었다.
그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한훤당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 후 1506년(연산군 11년)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중종 때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1517년(중종12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1568년(선조1년) 문헌공(文獻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1610년(광해2년)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5현으로 문묘에 종사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 (主客問答說)》, 《진수잡저 (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구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할 뿐이다.
1689년 3월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글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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