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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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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세종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鄭麟趾, 1396년 12월 28일 ~ 1478년 11월 26일)는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하동,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다.

1452년부터 1454년까지 《세종실록》의 편찬과 감수를 맡았으며, 세조를 지지하여 계유정난, 세조반정 등에 적극 동조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에 협력한 공로로 특별승진하여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5년(세조 1) 영의정부사에 승진하고 세조 반정을 지지한 공로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5년부터 1458년까지 영의정부사를 지냈으며, 역사와 고전에도 능하여 고려사고려사절요, 용비어천가의 편찬과 감수, 태조실록의 수정에도 참여하였다. 1468년, 예종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남이·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翊戴功臣) 3등관이 되고, 예종 사후 원상으로 서정을 주관하다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장남 정현조세조의 사위였고, 손자 정승충은 세조의 서자 덕원군의 사위가 되어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증손녀 하동부대부인선조의 생모가 된다. 또한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외증조부가 되기도 하다. 권우(權遇)의 문인이다.

 

서적 편찬과 중수 주관

1431년 정초(鄭招)와 함께 역법을 설명한 《칠정산내편》을 저술하였고, 1445년 의정부우참찬으로 재직 중에는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1451년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 편찬과 수정, 보수하는데 참여하였고, 1452년(문종 2) 초에는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하여 1452년 이를 완성시켰다.

 

한글 창제

1425년부터 1446년에는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 참여하여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어문 연구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원하였다.

 

가곡 관련

권제,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짓기도 했다. 이는 조선 세종의 6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업적과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설명한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당시 당대의 이념에 따른 제작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 왕조에 반기를 들게 한 정도전이 정리한 고려사정도전의 일을 비판적으로 생각한 하륜이 쓴 태조실록정도전고려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태종의 뜻이 반영된 고려사를 바탕으로 정인지 등이 용비어천가를 지어냈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용비어천가는 당대의 이념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종서와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삼국시대통일신라, 고려조의 가곡들의 제목을 수집, 수록하여 고려사악지라 이름붙였다.

정인지 등은 고려사를 편찬하고 그 중 고려사악지를 엮어 고려 시가를 일단 역사적 측면에서 비판 정리하였다. 특히 실전(失傳)하고 없는 신라·백제·고구려·고려의 시가들에 대한 제목과 유래가 기록되어 있어 이 곡들의 존재를 후세에 알리게 했다.

 

평가와 비판

문감(文鑑)의 눈이 밝아 여대(麗代)의 문사(文士)들을 잘 평하였고, 천문(天文), 역법(曆法), 아악(雅樂)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 高麗史≫를 찬수(撰修)하였다. 역사에도 능하고 고전에 밝았다. 천성이 영매하고, 도량이 넓고 맑은 하늘같이 깨끗하며 평생 나쁜 말이나 성내어 얼굴빛을 붉히지 않으며 성품 또한 검약하여 의복과 음식 그리고 대궐에 등청(登廳)하실 때 교자(轎子)등도 평범하게 하였고 대궐에서도 너무 지나치게 치례하는 일은 하지 않으셨으며 집에 계실 때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시고 머리 빗고 백가제서(百家諸書)를 손수 다 풀어 통달하시었으며 특히 역학(易學)을 연구하는데 정진하셨으므로 호(號)를 학역재(學易齋)라 하였다.

세종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컸고 훈민정음예제(訓民正音解例) 끝에 서문을 썼으며, 안지(安止), 최항(崔恒) 등과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음으로써 국어국문학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집현전학사들 중 단종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언을 저버리고 수양대군의 편에 가담한 일 때문에 세조 말년부터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로부터 비판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중종조 이후로 남이의 옥사유자광, 한명회 등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이 보급되면서 그는 후대의 사림파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비판받다가 1970년대 이후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재평가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타

정인지는  막걸리를 보고 젖과 막걸리는 생김새가 같다하며 아기들이 젖으로 생명을 키워 나가듯이 막걸리는 노인의 생명을 키워나가는 노인의 젖줄이라고 비유했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자 단종을 모시던 궁녀들이 따라가서 모시려고 하였는데, 이때 정인지는 궁녀를 단 한명도 보내줘서는 안된다고 적극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야사에 의하면 그날 밤 세종대왕이 꿈에 나타나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학맥

정인지는 학통상으로는 정몽주의 학파였다. 그러나 아버지 정흥인은 정도전의 문하였는데 5세부터 13세, 성균관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부친으로 부터 학문을 익혔다.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정도전권우→정인지로 이어진다. 왕자 시절의 충녕대군(세종대왕)을 가르쳤던 성리학권우가 그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정인지는  단종을 부탁하는 세종의 청을 저버리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고, 이후 세조 말년 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한 같은 정몽주학파의 후배들에게 선배로 인정받지 못하고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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