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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고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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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고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다.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자는 천여(天汝), 본관은 진주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유언으로 남겼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

 

유년기 시절

유일한은 조선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과 김기복(金基福)사이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에서 아버지가 환전해준 미국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서 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중서부 특유의 타락한 문화적 분위기도 하나의 원인이 된)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1909년 입학한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 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때 일본경찰에게 연행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대학교 생활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이를 안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지, 운동부에서 활동하라고 보낸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였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 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식품사업가 시절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유한양행

유일한은 1926년에 귀국하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이나 민중작가 최서해소설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유일한은 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1933년에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하였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음으로 물리친 일화가 있다. 1936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였다.

이후 회사의 운영을 동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유한양행의 사업 조직망 전체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에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해방 후 1946년 7월에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유일한은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고, 1971년에 타계했을 때 유언을 통해 사회 환원을 선언했다.

 

재산의 사회환원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예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유한공업고등학교유한공업전문대학을 운영하였다.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일한이 살던 은 겉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현재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연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또한 그의 사회기여로 세워진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성공회대학교를 마주하고 있다.

 

연보

1895년 - 1월 15일,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남.

1904년 - 국민학교 입학, 대한제국 수화공사 박장현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오름.

1919년 -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 선임.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 이곳에서 이승만,서재필과 만나 활동. 미시건 대학 상과 졸업.

1922년 - 미시건 대학 동창 친구 스미스와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설립.

1925년 - 호미리(胡美利) 여사와 결혼. 숙주나물 원료인 녹두 구매차 중국 상하이를 거쳐, 고국을 떠난 지 21년만에 북간도에서 가족들과 상봉.

1926년 - 세브란스 의전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인 호미리 여사는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장으로 초청받음. 라초이식품 등 미국재산 정리. 귀국. 12월 10일 유한양행 창립하고 초대사장으로 취임.

1941년 -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해외 한족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

1942년 - 미육군 전략처 OSS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 이때 노벨문학상 작가인 펄 S. 벅 여사와 교유. 8월 29일 미국 LA에서 재미 한국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 본사를 소사공장으로 이전.

1945년 - 국내 수복 작전인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1조 조장으로 활동.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OSS작전과 양면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8월 15일 광복으로 불발. 8.15 광복을 맞아 중화민국(중국)과 만주 및 38선 이북의 모든 기반과 자산을 상실.

1946년 - 8월, 미국에서 8년만에 귀국. 그 해 대한 상공회의소 초대회장 피선. 이승만으로부터 협력제의받았으나, 재차 거절하고 12월에 다시 도미(度美).

1948년 - 스탠포드 로스쿨에서 국제법 수학.

1962년 -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上場). 유한치약 생산 개시. 재단법인 유한학원 설립.

1963년 - 개인소유주식 1만 7천주를 장학기금으로 연세대와 보건 장학회에 기증.

1964년 - 12월,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서울 영등포구 항동에 '유한공업고등학교' 건립.

1965년 - 개인주식 5만 6천주를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사업 확대. 연세대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 받음

1970년 - 3월, 미국의 킴벌리클라크(주)와 합작으로 '유한킴벌리주식회사' 설립. 그 해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받음.

1971년 - 3월 11일 사망.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995년 - 독립운동 활동 이력이 밝혀져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저서

When I was a boy in Korea, Lothrop, LEE & Sheperd Co., 1928년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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