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융희제, 기유각서 사건으로 허수아비 군주가 되다.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6일)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혈통은 사실상 조선에서 유래하므로, 역사성의 편의상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조선의 제27대 왕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 성은 이(李), 휘는 척(坧)이다.
특징
상기한 바와 같이 그는 부황 고종과는 달리 조선 왕의 신분으로 재위한 기간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제27대 왕으로는 볼 수 없다.
그는 대한제국 황제 치세 시절 연호를 따 융희제(隆熙帝: 1907년부터 1910년까지 3년 재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력
성은 이(李),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멸망된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이자 장자(長子)로 명성황후 여흥 민씨 소생이며,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고 후사는 없었다. 그의 아호 정헌(正軒)은 부황 고종이 그에게 내려준 아호였다. 그는 한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이기도 했다.
치세
1907년 7월 20일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907년 7월 20일부터 1909년 7월 12일까지 친정을 하였고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실권이 박탈되어 1909년 7월 12일부터 1910년 5월 30일까지 소네가 실권을 잡았으며 1910년 5월 30일부터 1910년 8월 20일까지 역시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실권을 잡았고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작전에 본격 휘말린 1910년 8월 20일부터 9일 후 1910년 8월 29일을 기하여 퇴위할 때까지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부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실권하였다.
왕세자, 왕태자, 황태자 시절
순종은 1874년 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 이척은 2세 때였던 187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5년 모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부황 고종과 함께 일본 낭인과 한국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의 왕세자 작위를 이복 서제 의화군 이강에게 선양하겠다며 왕세자 작위를 사양(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하려 하였지만 부왕 고종의 만류로써 왕세자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일단락성 사건으로써 겪으며 같은 해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그 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맛이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여 치아가 모두 망실되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김홍륙의 유일한 세력기반이 고종이었던 사실과, 김홍륙이 유배 당시 지속적으로 고종의 안위를 물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로 김홍륙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정적들인 친일파가 김홍륙에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즉위와 재위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았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고(고종 양위 사건), 보위 등극과 동시에 대한제국 육군 대장 예편과 아울러 원수에서 대원수로 승급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나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다.
순종의 황위계승자 책봉 배경 논란
순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이복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복동생 중 나이가 어린 영친왕을 황위계승자(황태자)로 봉하였다. 그러나 이복동생 중에는 의친왕도 있었고, 의친왕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시켜서 황태자로 임명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영친왕을 태자로 봉했는가의 배경은 아직까지도 대한제국 역사의 미지수이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계승자(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재위 절정기와 대한제국 황제 통치권 피탈
즉위한 해인 1907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하였다.
이 무렵 일본이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토는 1909년 안중근에 의하여 청나라 만저우 지방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
한편 같은 해인 1909년 기유각서 사건으로 인하여 황제 순종의 실권은 제2대 대한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박탈되고 순종은 이듬해인 1910년까지 허수아비 군주의 신세가 되었다. 뒤이어서 제3대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고 급기야 한국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실권을 하며 1910년 경술한일합방늑약으로 인하여 사실상 일제가 한반도에 무혈입성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게 되었다.
퇴위와 생애 후반
1910년 일제는 순종에게 한일 병합 늑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였으며, 아울러 역사상 왕조는 끝맺음하게 되었다.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아버지 고종의 뒤를 이어 그는 원치 않는 왕위를 이어받지만 이미 일본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무렵이었다. 그는 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도쿄를 방문해 천황을 알현할 것을 압박받는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의를 다해 마땅한 일이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인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순종 실록』의 부록에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7년 6월 8일: 남대문역에 직접 나가서 특별열차를 타고 도쿄로 행하였다. / 6월 14일: 황궁에 나아가 천황과 황후를 봉황문에서 알현하고 현소에 참배하였으며, 이어 동궁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심장마비로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아버지 고종황제의 홍릉 근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3.1 운동처럼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순종이라는 묘호(廟號)는 1926년 5월 1일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제안한 순종, 경종(敬宗), 성종(誠宗) 중 수망(首望)대로 결정했다.
☞ 연관글
[역사보기] - 고종 양위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