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평가와 비판, 당시 생존의혹,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 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 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한테 겨냥하는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당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친일 성향을 띤 급진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과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에 의해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 일본 낭인
일본 자객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
조선인 협력자들
명성황후 암살의 국내 고위급 협력자로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거물 협력자로 지목했다.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강간 또는 시간 논란
당시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파견와 있던 일본인 다치스카 에이조(立塚英藏)는 낭인들이 왕비를 강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다치스카 에이조는 스에마쓰(末松) 일본정부 법제국장(法制局長)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낭인들이 왕비의 시신을 자른 뒤 국부검사를 했다고 기록하였다.
다치스카는 보고서에서 '왕비를 끌어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 검사를 하고, 다시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니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함이라'고 하였다.
노출기피증, 대인기피증, 암살공포증 논란
명성황후는 생전에 노출 기피증을 갖고 있었다. 흥선대원군 추종 세력에 의해 친척들이 암살당하면서 그의 노출기피증과 대인기피증, 암살공포증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제대로 된 사진이 없는 것의 한가지 이유는 명성황후의 노출기피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목숨을 노릴 정도로 서로를 증오했고, 결국 그의 친정 양오라버니인 민승호 일가는 대원군이 보냈으리라고 추정되는 우편 폭탄을 맞고 죽었다. 이후로 명성황후의 대인기피증과 노출기피증은 더욱 심해져서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만나지도 않았고 초상화나 사진을 일절 찍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생존 의혹
2013년 7월 1일, 1896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 실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앞으로 보낸 비밀문서의 내용을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가 한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한 내용은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아주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 로바노프는 일본군이 한국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처럼 일본군도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였다.
한편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 1895년 10월 9일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니콜라스 오커너에게 “일본인들이 서너 명의 궁녀를 죽였다. 그리고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어 10월 22일에는 오커너에게 베베르가 자신을 방문해 왕비의 생존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당했다는 게 한국 역사학계의 정설이나 정상수 교수는 "독일과 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명성황후의 시해를 당연시할 게 아니라 새로운 사료 발굴로 진실을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에 대한 역사학자의 여러 반응으로, 전우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이번 문서는 일본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외교가 풍문에 관한 새 자료 정도로 봐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에 대해 “명성황후 생존은 을미사변 뒤에 일어난 여러 사실을 보면 있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한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것은 수긍하지만, 라돌린 문서가 아관파천 즈음에 나온걸 보면 러시아 공사관 대피를 원한 사람이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시했다.
당대의 평가
그의 벗 윤치호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재필은 명성황후가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평가하였다. 1947년 군정기 때의 한 회고담에서 서재필은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민비 앞에 나가면 으레 민비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민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라며 그녀가 사태 분석에 기민했다 고 평하였다.
후대의 평가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 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황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척족정치의 악순환을 거듭케 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 평론가는 비슷한 시기 청제국을 쇠퇴시킨 서태후와 동급을 취급하기도 한다. 보통 그들은 서태후와 명성황후를 19세기 동양의 최악의 황후라고 비판한다.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지적,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 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국고 탕진에 대한 다른 자료는 없을 뿐더러, 내수사에서 관리하는 자금은 국고이지도 않았다. 내수사는 국고는 관리하지 않고, 국왕 및 왕실의 재산만 관리한다.
외척으로 편중된 권력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뒤 황후는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시켰다. 이 중 민겸호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서 주어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문정공 송준길은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며 민유중은 송준길의 사위이다. 명성황후는 송준길 집안에 대해서는 가까운 외가의 의를 지켰고, 정씨 집안을 추대해서 역시 외척같이 각별히 생각해 왔다. 명성황후는 정경세를 부르기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송씨, 정씨 두 집안의 후손들은 크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이때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친골육지간이지만 사이가 나빠져, 아버지 대원군을 혐오했던 것 같았다. 이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내전(왕비)는 돈목을 감소시키고 대전(임금)은 돈목을 증가시키면 좋겠다."는 것이다.
기타
명성황후의 정확한 사진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사진 촬영을 기피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명성황후라고 알려진 사진은 명성황후와는 관련이 없다 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어의조차 명성황후의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명성황후가 사진을 기피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그 밖에 동시대에 살던 이승만이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에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언급한 사진이 한 개 기록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저서에 나온 사진도 명성황후인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1894년 겨울 최초로 피겨스케이팅을 구경하였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저서 ‘조선과 이웃나라들’에서 1894년 겨울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초청으로 경복궁 향원정에서 첫 시연을 했다고 적고 있다. 또 '남녀가 사당패와 색주가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양에 대해 명성황후가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한글편지가 공개되었다.
글씨 보고 밤사이에 아무 탈 없이 지낸 일 든든하며,
여기는 임금의 문안도 아주 평안하시고,
동궁의 정황도 매우 평안하시니 축수하며,
나는 한결 같으나 다리의 통증이 한결 같다.
영복이 검교는 그리 하겠다.
임금을 모신 것에 대해 상을 내리는 일은 알아보겠다.
안준옥이는 자리를 옮기겠다.
오늘 일기도 춥고 차다.” — 명성황후의 한글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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