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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군사와 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더보기
김개시,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다. 김개시,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다. 상궁 김씨(생년 미상 ~ 1623년)는 광해군 때의 상궁이다. 본명은 김개시(金介屎). 원래 처소나인이었는데 선조의 눈에 들었고, 결국 선조의 승은을 입었다. 일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회임하였을 때 도깨비 소동으로 유산을 시키려 하였고, 궁 안에 선조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녀가 선조의 약밥에 독을 타 독살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생애 그녀의 출신은 알수 없지만, 야사(野史)에 따르면 1600년 전후에 궁에 궁녀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세자(世子)인 광해군을 만났고, 광해군을 모시는 궁녀가 된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눈에 띄어 승은을 받아 특별상궁으로 되었고, 미모는 아니나 민.. 더보기
광해군,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다. 광해군,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다.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듯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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