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썸네일형 리스트형 단발령, 일본인, 서양인들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다. 단발령, 일본인, 서양인들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다. 단발령(斷髮令)은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의 칙령이다. 서양인,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다. 당일부로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1897년(건양 1년) 일단 철회되었으나, 1900년(광무 3년) 이후 광무개혁을.. 더보기 제물포 조약,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로 맺은 불평등 조약 제물포 조약,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로 맺은 불평등 조약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 일본어: 済物浦条約)은 1882년 8월 30일(고종 19년 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과 일본 제국은 임오군란 때의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파견, 유력한 육해군의 시위 아래 제물포에 상륙했다. 일본의 출병 소식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영선사 김윤식의 의견을 청취하고 속국을 보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오장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재빨리 출동케 했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일본 공사를 자중시키는 한편, 조선 정부의 태도.. 더보기 조선책략, 황준헌 조선이 선택해야 할 전략을 제시하다. 조선책략, 황준헌 조선이 선택해야 할 전략을 제시하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은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黃遵憲, 황쭌센)이 1880년경에 저술한 외교문제를 다룬 외교 방략서이다. 원명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다. 이 책의 내용은 김홍집, 박영효 등이 공동으로 정리한 수신사일기 중 2권에 따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배경 황준헌은 조선이 러시아를 경계하여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러시아가 서양 공략을 이미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번연히 계획을 바꾸어 그 동쪽의 땅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 십여년 이래로 화태주(사할린)를 일본에게서 얻고, 중국에게서 흑룡강 동쪽을 얻었으며, 또한 도문강 입구에 주둔하여 지켜서 높은 집에서 물병을 거꾸로 세워 놓.. 더보기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담 하나를 경계로 대한제국을 보는 듯 하다.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는 천장산(天藏山)은 하늘이 감추었다는 이름이며, 한양의 주산 북악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려온 곳으로 조선황실의 땅이었다. 천장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1897 - 1919)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고종황제)의 황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와 의민황태자의 맏아들이자 엄귀비의 손자인 이진(1921~1922)이 모셔져 있다. 번잡한 청량리동에서 담 하나를 경계로 숲이 우거진 아담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을 보는 듯 그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영휘원 엄귀비는 조선 철종 5년(1854) 11월에 평민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태어나 5살에 아기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명성황후 민씨의 총애를 받아 그를 모시.. 더보기 아관파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관파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 (1900년경) 명칭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을 한자로 ‘아라사’(俄羅斯)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관’(俄館)이란 러시아 대사관을 뜻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노서아’(露西亞)라고도 하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노서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9월 5일 노서아-일본의 강화 조약 기록이 유일하며, 러시아 대사관을 ‘노관’(露館)이라고 칭.. 더보기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 (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준비과.. 더보기 갑오개혁, 세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운동 갑오개혁, 세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운동 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년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8월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 운동을 말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세분화하여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나눌 수 있으며, 후에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군국기무처 개혁의 기간과 내용 한말(韓末)에 일어난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혁명 등은 극도로 부패한 조선왕조와 양반계급에 대한 민중의 자아 각성에 의한 반발이며, 누습에 젖은 수구파(守舊派)에 대하여 신제도로 개혁하려는 개화파의 혁신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자아각성과 근대적 혁명을 기도한 동학혁명은 마침내 외세의 개입으로 소기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