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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허균, 사상과 활동 (4) 허균, 사상과 활동 중국 방문과 넌설헌 문집 편찬 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명의 문인,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명의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성에 찬탄(讚嘆)하여 특별히 출간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대북이 집권하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연장에 들었다.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參議)가 되고 명에서 국왕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명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그러나 귀국 후 1610년 2월 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더보기
허균, <홍길동전>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다. 허균,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다. 허균(許筠, 1569년 12월 10일(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강릉 초당동 허균의 생가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 (白月居士)로도 불렸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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