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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흥덕왕, 귀족의 사치를 규탄하고 골품제도에 따라 신분의 구분을 엄히 하다. 흥덕왕, 귀족의 사치를 규탄하고 골품제도에 따라 신분의 구분을 엄히 하다. 흥덕왕(興德王, 777년 ~ 836년, 재위 : 826년 ~ 836년)은 신라의 제42대 왕이며,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升) 이고 즉위 후에 경휘(景徽)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소성왕과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정목왕후로 추존)이다.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청해진(淸海鎭)과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사치를 법으로 규제하였다. 즉위 809년 동복 형 헌덕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을 지지하여 이찬이 되었고, 819년 2월 또 다.. 더보기
헌덕왕, 당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행하다. 헌덕왕, 당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행하다. 헌덕왕(憲德王, ? ~ 826년, 재위: 809년 ~ 826년)은 신라의 제41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언승(彦昇)이고, 신라 원성왕의 장남인 김인겸의 차남으로 소성왕의 동생이다. 즉위 전 원성왕 6년(790년)에 사자로서 당나라로 갔고, 귀국후에 대아찬이 되었다. 다음 791년 전 시중 제공(悌恭)의 반란 진압에 공적을 세었고, 794년에는 당시 시중 김숭빈(金崇斌)이 물러나고 언승이 시중에 발탁 되었다. 795년에는 이찬, 796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을 거치고, 800년에 애장왕이 즉위 하면서 그 섭정이 되었다. 게다가 801년에는 왕의 행차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어, 그 다음에는 상대등이 되었다. 809년 7월 동생과 함께 애장왕을 죽이고, .. 더보기
소성왕 신라 39대왕과 애장왕 신라 40대왕 소성왕 신라 39대왕과 애장왕 신라 40대왕 소성왕 소성왕(昭聖王, ? ~ 800년, 재위: 798년 ~ 800년)은 신라의 제39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준옹(俊邕)이다.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한다. 원성왕의 장손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생애 아버지가 태자로 죽었으므로 궁중에서 자라서 789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 후 대아찬이 되고 시중 등을 거쳐 이듬해 병부령이 되었다. 795년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의 덕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2년 만에 죽어 이후로 신라 왕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었다. 애장왕 애장왕(哀莊王, 788년 ~ 809년, 재위: 800년.. 더보기
김헌창의 난, 부친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다. 김헌창의 난, 부친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다. 김헌창의 난(金憲昌-亂, 822년)은 신라 제41대 헌덕왕 때 김헌창이 자기의 부친 김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갖고 일으킨 반란이다. 신라 말기는 정치적인 혼란기를 겪으며 왕위 쟁탈을 중심으로 음모, 반역, 골육상잔의 난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800년 제40대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상대등에 오른 원성왕계 자손인 김언승(이후 41대 헌덕왕)은 세력을 쌓아 조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809년 제41대 헌덕왕에 오른다. 이때 태종 무열왕계 자손으로 왕위 경쟁을 벌이던 김주원은 명주(강릉)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 중앙정계에 남아 807년에는 시중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상대등 김언승에 버금가는 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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