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군사와 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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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오리정승,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다.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다.
이원익, 오리정승,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다.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다. 이원익(李元翼, 1547년 ~ 1634년)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 학자, 정치인이다.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 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 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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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처단을 반대하다 유배지에서 병사하다.
이항복,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처단을 반대하다 유배지에서 병사하다. 이항복(李恒福, 1556년 ~ 1618년 7월 4일(음력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가·시인·작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오성과 한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양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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