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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2)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곽재우는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 더보기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군사와 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더보기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光海君-中立外交)라고 한다. 뒤에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집권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 더보기
계축옥사, 남인세력이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다. 계축옥사, 남인세력이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 (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대북은 또 왕권에 계속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1613년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이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 이 일어났다. 그 범인 일당은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로, 자신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컫는 무리였다. 그자들은 적서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 더보기
계축일기, 조선시대의 궁중수필 계축일기, 조선시대의 궁중수필 계축일기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를 모시던 나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지은 조선시대의 궁 중수필이다. 인목왕후또는 그녀의 딸인정명공주(貞明公主) 가 지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광해군의 정치중 인목왕후 유폐와 영창대군 살해만 다루었을 뿐, 중립외교, 전란극복 등 업적들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광해군이나 북인에 대한 적대세력이 쓴 소설일 가능성도 있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중문학의 하나로 《서궁록(西宮錄)》이라고도 한다. 광해군과 영창대군과의 왕위 계승을 위한 싸움 및 영창대군 처형 사건을 중심으로, 인목왕후의 심정을 상세하고 실감있는 필 치로 그려냈다. 궁중문학으로 소설문학의 발달에 기여했으며, 궁중비사를 그려 일반 백성과.. 더보기
인목왕후,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다. 인목왕후,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다.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는 조선 선조(宣祖)의 계비 이다. 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로 불리나, '인목(仁穆)'은 죽은 뒤에 받은 시호(諡號)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렸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 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 더보기
이원익, 오리정승,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다.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다. 이원익, 오리정승,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되다. 대동법에 적극 찬성하다. 이원익(李元翼, 1547년 ~ 1634년)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 학자, 정치인이다.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 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 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 더보기
이항복,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처단을 반대하다 유배지에서 병사하다. 이항복,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처단을 반대하다 유배지에서 병사하다. 이항복(李恒福, 1556년 ~ 1618년 7월 4일(음력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가·시인·작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오성과 한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양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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