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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이황,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이황,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출생과 가정 환경 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과 부인 문소김씨(2남 1녀) .. 더보기
건저문제,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다. 건저문제,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다. 건저 문제(建儲問題)는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며,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도 한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던 일을 뜻한다. 배경과 과정 정여립 사건을 가혹하게 진압하여 서인의 영수 정철은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이에 동인은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가 신성군(信城君, 1578년~1592년 11월 5일)을 낳자 신성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당시 동인의 영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인빈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친교하고 있었다. 이산해는 우의정이던 유성룡, 정철과 함께 세자 책봉을 논의한다. .. 더보기
선조, 국가의 큰 재앙을 스스로 자초한 무능한 왕 선조의 목릉 선조, 국가의 큰 재앙을 스스로 자초한 무능한 왕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성은 이(李), 휘는 연(昖),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첫 작위는 하성군이었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 (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 더보기
병산서원,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다. 병산서원,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사적 제260호로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 선조5년 서애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개요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풍산현에서 1572년 선조 5년 서애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오면 서부터 병산 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 광해군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 광해군 12.. 더보기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역모인가? 조작인가? 사진 출처 : 디지틀 조선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역모인가? 조작인가?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 께 3년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 정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 립과 .. 더보기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1) 유성룡의 편지 서신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관료,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과 원균.. 더보기
훈련도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창설부대 훈련도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창설부대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5군영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어 그 중심을 차지하였다.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역사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전통적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거해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선조 26년)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다. 정병(精兵) 양성과 기민(飢民) 구제 임무를 맡아 오다가 1594년부터 수도 방위·국왕 호위 임무를 겸하여 종래 오위가 담당 하던 기능을 대신하였다. 이어서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지자 어영청·금위영.. 더보기
징비록, 임진뢔란의 공과를 평가한 반성의 기록 징비록 표지 징비록, 임진뢔란의 공과를 평가한 반성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으로,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마쳤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저술의 동기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류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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