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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공산성, 공주 10경, 충청권에서 최초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다. 공산성, 공주 10경, 충청권에서 최초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다.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충청남도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성이다. 해발고도는 110m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의 문주왕 원년(475) 한강유역의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대표적인 웅진시대의 도성이었으며 그 후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 시대 토성 735m, 조선시대 석성 1925m, 총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이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 더보기
낙화암,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다. 낙화암,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다.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 더보기
의자왕, 낙화암과 3천 궁녀,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우다. 의자왕, 낙화암과 3천 궁녀,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어 싸우다. 의자왕(義慈王, ? ~ 660년, 재위 : 641년 ~ 660년)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혹은 31대 국왕)이다.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며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태자 시절부터 아우들과 우애가 깊고 사려가 깊어 중국의 사상가 증자에 견주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졌다. 말년의 실정으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 부터 이어진 백제는 멸망하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낙양으로 끌려갔다. 즉위와 정변설(說)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 33년) 정월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641년에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 더보기
황산벌 전투, 계백 가족들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나서다. 황산벌 전투, 계백 가족들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나서다. 황산벌 전투는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황산벌(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서 백제군 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삼국유사 태종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배경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었다.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13만, 합하여 18만의 군사가 백제로 쳐들어갔다. 당나라는 수로를 이용해 백제의 백강 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탄현쪽으로 쳐들어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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