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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韓國을 빛낸 百名의 偉人들)은 박인호(박문영)가 작사, 작곡하여 1991년에 최영준, 노사사(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로 발표한 노래이다. 한국의 역사인물을 주로 수식문과 함께 나열한 가사로, 대한민국에서 높은 대중성과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인물을 대략적인 연대 순으로 5절에 걸쳐 수식과 함께 나열했다. 인물이 아닌 집단도 있으며 실존 인물 외에 가공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음절상의.. 더보기
조광조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조광조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기묘사화 위훈 삭제 사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쓰자 왕 또한 뜻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 더보기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더보기
안정복,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다. 안정복,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다.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실학자이자 역사가이지만 성리학자이기도 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 더보기
허난설헌, 허균의 친누나, 맑스의 <소외론>과 비교되다. 허난설헌, 허균의 친누나, 맑스의 과 비교되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 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 더보기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2) 유성룡,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다간 조선의 명재상 영의정 최후, 사후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그 역시 정경세 등의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영남남인을 형성한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 (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5월 31일(음력 5월 6일)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 더보기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光海君-中立外交)라고 한다. 뒤에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집권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 더보기
김성일, 잘못된 판단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다. 김성일, 잘못된 판단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다.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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