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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기사환국, 기사사화,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서 사사하다. 기사환국, 기사사화,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서 사사하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15년(1689년)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 경과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 더보기
숙종, 전란 피해 복구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지다.(1) 숙종, 전란 피해 복구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지다.(1) 숙종(肅宗, 1661년 10월 7일(음력 8월 15일) ~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은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돈(焞),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보(明譜),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1674년부터 172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674년부터 1717년까지 친정하였고 1717년부터 1720년 승하할 때까지 아들 경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숙종은 역대 조선의 국왕들 중, 가장 왕권이 강했던 왕.. 더보기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갑술환국,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은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에 발생한 숙종 시대의 3차 환국으로, 기사환국이 발생한 1689년 2월 2일 이후로 정권을 집권해온 남인이 몰락하고, 기사환국 때 몰락했던 서인(노론·소론)이 재집권한 사건이다. 과정 숙종 20년(1694년) 3월 23일, 민암(閔黯)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宦官)·폐인(嬖人)과 척가(戚家)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風聞)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든다는 함이완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 이에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로.. 더보기
안정복,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다. 안정복,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사료 연구,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다.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 7월 20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리학자, 작가, 역사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이익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여러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실학자이자 역사가이지만 성리학자이기도 하여 1767년(영조 43년)에는 왕명으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어려운 구문을 해석,.. 더보기
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다. 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희빈 장씨의 저주굿을 발고하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년 12월 17일(음력 11월 6일) ~ 1718년 4월 9일(음력 3월 9일))는 조선의 19대 왕 숙종(肅宗)의 총관후궁이자, 21대 왕 영조(英祖)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생애 충무위 부사과를 지내고 후일 증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과 남양홍씨의의 딸로서 16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다. 1936년 장봉선 등이 편찬한 정읍군지에 의하면 숙빈 최씨는 정읍현 태인면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 한다. 그때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인현왕후가 .. 더보기
인현왕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다. 인현왕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 5월 15일(음력 4월 23일) ~ 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2번째 왕후(王后)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송준길의 딸)의 차녀(次女)이다. 1681년에 외조부 송준길의 친척 아우인 송시열의 후견으로 갓 왕비를 잃은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1689년 음력 5월 2일). 이후 한 달 뒤에 서인의 상징 인물인 송시열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1689년 음력 6월 3일). 5년 후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왕비(王妃)로 복위했다(1694년 음력 4월 12일). 1700년 음력 .. 더보기
숙종, 명릉, 신통한 지관 갈처가가 택한 입지이다. 숙종, 명릉, 신통한 지관 갈처가가 택한 입지이다. 능의 구성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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