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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변정도감

신돈, 전민변정도감,개혁자 보다는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간신으로 인식되어 오다. 신돈, 전민변정도감,개혁자 보다는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간신으로 인식되어 오다. 신돈(辛旽, 1322년 ~ 1371년 8월 21일 (음력 7월 11일))은 고려 말의 승려 출신 정치가이다. 법명은 편조(遍照)로, 신(辛)은 속성이고 돈(旽)은 환속(還俗)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다. 자(字)는 요공(耀空), 호(號)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본관은 영산이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서 대족(大族)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고 매골승(埋骨僧)과 떠돌이 승려로서 살았다. 승려로 살면서도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아 신도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받았고 개경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을 만나 시국관(時局觀)이 왕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환속 .. 더보기
전민변정도감,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실각하는 원인이 되다. 전민변정도감,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실각하는 원인이 되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고려 후기의 개혁 기관으로서,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악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특별기구이다. 공민왕 집권 기에 신돈이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고 했다. 중기 이후 권신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토지를 사유화했다. 이로써 농민은 땅을 잃고 과중한 과세에 견디지 못하여 유민(流民)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이에 원종 10년(1269) 처음으로 전민변정도감을 두.. 더보기
공민왕, 반원자주화, 개혁정치, 성균관을 재건하다. 공민왕, 반원자주화, 개혁정치, 성균관을 재건하다.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 우왕 2년에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며, 같은 왕 11년에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왕(恭愍王)이다.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伯顔 帖木兒, 몽골어:、Bayan Temür)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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