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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백이정, 안향과 함께 고려에 성리학을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다. 백이정, 안향과 함께 고려에 성리학을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다. 백이정(白頤正, 1247년~1323년)은 고려의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본관은 남포이다. 시호는 문헌(文憲).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중국에 가서 주자의 성리학을 배워온 뒤, 안향과 함께 고려에 성리학을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생애 신라 간관(諫官) 백중학(白仲鶴)의 후손이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다. 안향의 문인으로 이진(李瑱), 권부(權溥), 우탁(禹倬), 이조년(李兆年), 신천(辛蕆)과 더불어 안향 문하의 6군자로 불렸다. 1284년(충렬왕 10) 권단(權㫜)이 지공거였던 갑신방(甲申榜)에서 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1.. 더보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韓國을 빛낸 百名의 偉人들)은 박인호(박문영)가 작사, 작곡하여 1991년에 최영준, 노사사(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로 발표한 노래이다. 한국의 역사인물을 주로 수식문과 함께 나열한 가사로, 대한민국에서 높은 대중성과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인물을 대략적인 연대 순으로 5절에 걸쳐 수식과 함께 나열했다. 인물이 아닌 집단도 있으며 실존 인물 외에 가공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음절상의.. 더보기
길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다. 길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다.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등을 통해 사림파로 학맥이 계승되었다. 생애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더보기
선죽교, 정몽주의 피얼룩이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으로 남다. 선죽교, 정몽주의 피얼룩이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으로 남다. 선죽교(善竹橋)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 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몽주의 피얼룩은 후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구가 1947년 그곳을 방문할 때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특징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더보기
김굉필,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 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더보기
창왕, 폐가입진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다. 창왕, 폐가입진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다. 창왕(昌王, 1380년 9월 6일 (음력 8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3대 국왕(재위: 1388년 ~ 1389년)이다. 휘는 창(昌)이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식 시호는 없다. 이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연관이 있다. 후에 고려의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그밖에 후폐왕(後廢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위와 폐위 배경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인 왕창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5)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 요동정벌 계획 1392년 건국 지후부터 그는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혁파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 1396년 (태조 5년) 3월 과거 고시관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조유인(曹由仁), 이치 등 33인..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4)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4) 세자 책봉 문제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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