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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더보기
이황,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이황,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출생과 가정 환경 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과 부인 문소김씨(2남 1녀) .. 더보기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하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실리를 취하는 외교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이를 광해군의 중립외교(光海君-中立外交)라고 한다. 뒤에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선조는 왜란이 끝나고도 9년이나 더 집권한 다음 타계했으며, 1608년에 세자 광해군(光海君, 1608~1623)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유능한 왕자로서 왜란 때에는 항일의 공로도 매우 컸으나, 혈통상으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광해군시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광해군을 추종한 북인은 원래 동인 중에서 이황 문인을 제외한 여러 파벌이 연합한 붕.. 더보기
곽재우, 붉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1) 곽재우, 붉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문장의 글귀가 왕의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40세가 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질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한다. 여러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 더보기
이황,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불행한 가정사, 기생 두향 이황의 저서 《퇴계문집》 이황,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불행한 가정사, 기생 두향 이기 이원론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 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더보기
이익 [성호사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이익 [성호사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이익의 사상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통에 뿌리를 두며 허목, 윤휴, 윤선도, 이잠 등의 사상을 계승, 집대성하여 남인 성리학과 남인 실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 대에서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근기 남인이 정조 사후 천주교 문제로 몰락하게 되면서 흥선대원군 집권 전까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경세관 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첨성리(瞻星里) (현 안산시 일동)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사농합일(士農合-)을 주장했고 아울러 과거제도의 재검토를 제시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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