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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정강왕 김요의 난을 평정하다. 효공왕 견훤과 궁예에게 영토를 를 빼앗겨 멸망의 길을 가게 되다. 정강왕 김요의 난을 평정하다. 효공왕 견훤과 궁예에게 영토를 를 빼앗겨 멸망의 길을 가게 되다. 정강왕 신라 정강왕(新羅 定康王, ? ~ 887년, 재위: 886년 ~ 887년)은 신라의 제50대 왕이다. 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황(晃)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생애 김황의 형 헌강왕이 재위 12년째인 886년 7월 5일에 사망한 후 헌강왕의 태자 김요(金嶢)가 아직 돌이 안된 어린 나이였으므로, 김황이 신라 제50대 왕에 즉위하였다. 887년 1월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마련해 왕 스스로도 행차하고 강의를 들었다. 같은 달,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병하여 김요를 죽였다. 김요의 난을 평정한 후, 5월에 병을 얻어.. 더보기
진성여왕,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다. 진성여왕, 국정을 어지럽혀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 897년 12월 31일 (음력 12월 4일), 재위:887년 ~ 897년 음력 6월 1일)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씨,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생년은 미상이나 그녀의 부모인 경문왕과 문의왕후가 860년에 혼인했고 진성여왕이 그들 사이에서 3번째 자식인 점 그리고 문의왕후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860년대 중후반정도로 추정된다. 887년부터 89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887년부터 888년까지 이벌찬(각간) 김위홍(金魏弘)이 대리청정을 맡았고 김위홍(金魏弘)이 서거한 888년부터 897년 음력 .. 더보기
최치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다. 최치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다.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채 펼쳐보지도 못.. 더보기
궁예,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을 건국하다. 궁예 미륵 궁예,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을 건국하다. 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의 왕가 서족 (王家 庶族) 출신이며 태봉(후고구려, 마진)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 한다.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고, 별명은 미륵(彌勒), 일목대왕 (一目大王)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였다 가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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