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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

탕평책, 영조의 완론탕평, 정조의 준론탕평 탕평책, 영조의 완론탕평, 정조의 준론탕평 탕평책(蕩平策)은 조선 영조가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 추진한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후대인 정조 대에도 이어졌다. 이름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 중 5조인 황극설(皇極設)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 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는 글에서 유래했다. 가장 첫 탕평의 언급은 숙종조의 언급인데, 박세채가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경종 때 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영조부터 본격적인 탕평이 들어섰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인물들의 화해를 주선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정조 대에 이르러 성과를 거둔다.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기도 했.. 더보기
영조,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을 실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다. 영조,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을 실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다.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3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3월 5일) )는 조선의 제21대 임금 (재위,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이다.성은 이(李), 휘는 금(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숙 (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그러나 신임사화 등으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영조의 21살때의 모습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키게 된다. 숙종(肅宗)..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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