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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더보기
허난설헌, 허균의 친누나, 맑스의 <소외론>과 비교되다. 허난설헌, 허균의 친누나, 맑스의 과 비교되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 ~ 1589년 3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 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 더보기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광해군,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다. 민생과 문화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건설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군사와 외교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더보기
인목대비 폐비 사건,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폐위되다. 인목대비 친필 인목대비 폐비 사건,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폐위되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 또는 인목대비 폐모 사건은 1618년 조선 조정에서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西宮) 에 감금,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칠서의 변과 영창대군 추대 사건을 빌미로 북인은 인목왕후의 폐비를 주장했고, 허균, 이이첨 등은 적극 폐비론을 주도해 나 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에 의해 패륜아로 몰려 정죄당하게 된다. 원인 1608년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마음이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5세 된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긴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 더보기
허균, <홍길동전>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다. 허균,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다. 허균(許筠, 1569년 12월 10일(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강릉 초당동 허균의 생가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 (白月居士)로도 불렸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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