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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삼둔자 전투, 일본군 육군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 삼둔자 전투, 일본군 육군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침공한 사건 삼둔자 전투(三屯子戰鬪)는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부터 6월 6일 자정까지 대한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만주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변 삼둔자(三屯子)에서 니히미 지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예하 1개 중대를 격파한 소규모 전투였다. 한국인 독립군이 국내 진공을 목적으로 일본군을 선제 공격한 사건이기도 하다. 봉오동 전투로 이어지며 넓게는 봉오동 전투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6월 4일 새벽에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에서 출발한 독립군 홍범도, 최진동 부대의 1개소대와 신민단 독립군 예하 1개 소대가 당일 새벽 5시 경 함경북도 종성군 .. 더보기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다. 이범윤,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다. 이범윤(李範允, 1863년 12월 29일 ~ 1940년 10월 20일)은 대한제국의 간도관리사를 지낸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무위대장을 지낸 조선 말기의 무관(武官) 이경하(李景夏)의 아들이고 구한말의 정치가 이범진(李範晋)의 아우이며 구한말의 외교관 이위종(李瑋鍾)의 숙부이다. 1863년 12월 29일 경기도 고양 출생이다. 구한 말 간도 문제로 청나라와의 갈등 끝에 변계경무서가 설치된 뒤 1899년 37세 때 음서 천거로 관료가 되어 1902년 간도시찰로 임명되기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간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 더보기
자유시 참변,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하다. 자유시 참변,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하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시대적 배경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 더보기
청산리 전투의 전개 과정,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키다. 청산리 전투의 전개 과정,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키다.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또는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 지린 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다.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고자 훈춘 사건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더보기
홍범도,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다. 홍범도,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다. 홍범도(洪範圖,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생애 평안도 평양 서문안 문열사 부근에서 출생하여 평안도 양덕과 평안도 자성에서 성장한 그는 청년 시절부터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였다. 의병과 독립군 활동 28세 시절이던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더보기
봉오동 전투,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다. 봉오동 전투,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다.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인 독립군은 천 2백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백여 명 정도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선다. 1920년 6월 7일 북로 제1군.. 더보기
신흥무관학교, 무장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다. 신흥무관학교, 무장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11년 서간도(길림성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의 전신이다. 신흥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배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에 맞서 항일 의병 전쟁과 같은 저항이 있었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전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남한 대토벌 작전과 같은 잔혹한 진압작전을 도입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고1910년 조선이 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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