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분열 통치기 (문화 통치기, 1919년 ~ 1931년)
민족 분열 통치기 (문화 통치기, 1919년 ~ 1931년)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일부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제한적으로나마 허가되기 시작하였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민생 안정보다 회유책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한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한반도에서 식민 통치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사이토 총독의 대책문에서 뚜렷히 알 수 있다. 1.핵심적 친일 인물을 골라 그 인물로 하여금 귀족, 양반, 유림, 부호, 교육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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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
신간회,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는 전국구는 물론 해외 지부까지 두고 있는 단체로 회원 수가 3~4만여 명 사이에 이르렀던 대규모 단체였다.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조선민족운동의 대표단체로 발족했다. 사회주의계, 천도교계, 비타협 민족주의계, 기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으나, 자치운동을 주장하던 민족개량주의자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창립총회에서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그리고 안재홍, 신석우, 문일평을 비롯한 간사 35명을 선출하고, 조직확대에 주력, 1928년 말경에는 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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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3·1운동을 잇는 민중적인 항일운동
6·10만세운동, 3·1운동을 잇는 민중적인 항일운동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 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 기탁, 인쇄 직공 민경식, 이민재, 연희 전문의 이병립, 박 항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 천진, 천도교의 박대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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