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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백제 부흥운동으로 무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의 군주가 되다. 견훤, 백제 부흥운동으로 무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의 군주가 되다. 견훤(甄萱, 867년 ~ 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 ~ 935년 음력 3월)은 신라 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시조이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더보기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문재인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 문재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지금 제 두 어깨는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부여받은 막중한 소명감으로 무겁습니다. 지금 제 가슴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새로운 대한민국은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대들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나라입니다. 또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며 우리 젊은이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했던 나라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는 역사와.. 더보기
호패법, 전통 봉건시대에 신분증 구실을 하다. 호패법, 전통 봉건시대에 신분증 구실을 하다. 호패(戶牌, 號牌)는 전통 봉건시대에 신분증 구실을 하는 작은 패(牌)로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녔다. 고려와 조선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신분 계층별로 재질과 기재 내용에 차등을 두었다. 사망 시에는 국가에 호패를 반납하였다. 연원 현재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것으로 그 기원은 원나라에서 시작되어 한국은 1354년(고려 공민왕 3)에 이 제도를 모방, 수·육군정(水陸軍丁)에 한하여 실시하였으나 잘 시행이 되지 않고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그 사용범위가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호적법(戶籍法)이 보조 역할로 시행되었다. 그 목적은 ①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하고 ② 직업·계급을 분명히 하여 ③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가장.. 더보기
최승로, 시무28조는 고려 국정운영의 중요한 기조가 되다. 최승로, 시무28조는 고려 국정운영의 중요한 기조가 되다. 최승로(崔承老, 927년 ~ 989년)는 고려 초의 유학자,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신라 6두품 출신 최은함(崔殷含)이다. 성종(成宗)에게 시무 28조를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바친 시무 28조는 대부분 수용되어 고려의 정치제도와 지방통치 등 국정 운영의 중요한 기조가 되었다. 생애 최승로는 신라 조정의 관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18년(935년)에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최은함은 아들과 함께 귀순하였다. 《고려사》에는 최은함의 벼슬을 원보(元甫),《삼국유사》에는 정보(正甫)로 적고 있다. 《고려사》 최승로열전에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기도하여 승로를 낳았다(久無嗣禱而生承老.. 더보기
발해 무왕, 처음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다. 발해 무왕, 처음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다. 무왕(武王, ? ~ 737년, 재위 : 719년 6월 ~ 737년)은 발해의 제2대 국왕으로 휘는 무예(武藝)이다. 연호는 인안(仁安)이다. 발해의 시조 고왕 대조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고왕은 몰락한 고구려의 장군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로 이주된 형편이었다. 즉위 고왕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과 격돌, 크게 격파하고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고왕이 719년 붕어하자 보위를 승계하고, 연호를 고쳐 인안(仁安)으로 하였다. 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꾀했고 726년 부여의 후계 국가인 두막루와 여러 말갈 부족을 발해로 병합하였다. 무왕은 727년 발해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사.. 더보기
위안스카이,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리다. 위안스카이,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리다. 위안스카이(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는 중국 허난 성 쉬창 부 샹청 현 출신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이자 중화제국의 황제이다. 그의 자(字)는 웨이팅(중국어 정체: 慰庭, 병음: wèi tíng)이며 호(號)는 룽안(중국어 정체: 容庵, 병음: róng ān)이다. 청나라 말기에서 신해혁명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과도 관계가 깊어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광서제를 대신함으로 내정 간섭을 수행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주하여 귀국하여 이후, 청나라 군대의 신식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무술변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하였다. .. 더보기
의화단 운동 평가와 한계와 비판, 부청멸양 의화단 운동 평가와 한계와 비판, 부청멸양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의화단의 난이라고도 하며 1900년, 즉 경자년(庚子年)에 일어난 교난이라는 의미로 경자교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의화단을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라는 의미의 ‘권비(拳匪)’나 ‘단비(團匪)’로 지칭하였는데, 따라서 의화단운동을 ‘의화단의 난,’ ‘권비의 난,’ ‘단비의 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산둥 지역에서는 일찍이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됐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더보기
메이지 유신,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다. 메이지 유신,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다. 메이지 유신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고를 통한 중앙 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것은 학문상의 명칭으로 당시에는 어일신등으로 불리었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에 대해 대체로 덴포(天保) 시기로 일치하고 있지만 종료 시기에 대해서는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1873년 지조개정(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으로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1889년 헌법 제정으로 메이지 유신이 종료되었다고 본다. 배경 에도 막부는 외교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서 오랫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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