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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위 계보 길림성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 왕위 계보 1.동명성왕(B.C.37~B.C.19) ― 2.유리왕(B.C.19~A.D.18) ― 3.대무신왕(18~44) ― 5.모본왕(48~53) | |---4.민중왕(44~48) | |----고재사------ |--5.모본왕(48~53) | |--6.태조왕(?53~?146) | |--7.차대왕(146~165) | |--8.신대왕(165~179) | |9.고국천왕(179~197) | |--10.산상왕(197~227)--11.동천왕(227~248)--12.중천왕—13.서천왕(270~292)----14.봉상왕(292~300) | |--고돌고----15.미천왕(300~331)----16.고국원왕(331~371)----17.소수림왕(371~384) | |--18.고국양왕(384~39.. 더보기
이익 [성호사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이익 [성호사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본다. 이익의 사상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통에 뿌리를 두며 허목, 윤휴, 윤선도, 이잠 등의 사상을 계승, 집대성하여 남인 성리학과 남인 실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 대에서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근기 남인이 정조 사후 천주교 문제로 몰락하게 되면서 흥선대원군 집권 전까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경세관 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첨성리(瞻星里) (현 안산시 일동)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사농합일(士農合-)을 주장했고 아울러 과거제도의 재검토를 제시했다.. 더보기
전봉준, 녹두장군, 민권을 제창한 혁명가요, 사상가 전봉준, 녹두장군, 민권을 제창한 혁명가요, 사상가 전봉준(全琫準, 1854년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정치인이며 동학의 종교 지도자였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북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도 있었다.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별명이었던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 더보기
아관파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관파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 (1900년경) 명칭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을 한자로 ‘아라사’(俄羅斯)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관’(俄館)이란 러시아 대사관을 뜻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노서아’(露西亞)라고도 하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노서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9월 5일 노서아-일본의 강화 조약 기록이 유일하며, 러시아 대사관을 ‘노관’(露館)이라고 칭.. 더보기
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1) 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1)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더보기
박제가,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 박제가,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 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15년 4월 25일)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또는 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박제가 1778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9년 3월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그 뒤 전설서 별제와 1791년 임시 군기시정, 1792년 군기시정 등을 거쳐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 .. 더보기
박문수,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알려져 별견어사로 4번 파견되다. 박문수,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알려져 별견어사로 4번 파견되다. 박문수(朴文秀, 1691년 ~ 1756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정치가(政治家)이다. 자(字)는 성보(成甫)이고 호(號)는 기은(耆隱)이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아버지는 박항한(朴恒漢)이고 큰 아버지는 박태한(朴泰漢)이다. 박문수 초상 생애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다. 이듬해 설서(設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에 등용되어 영남안집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 더보기
유득공, [발해고], 민족의 주체의식과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있다. 유득공, [발해고], 민족의 주체의식과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있다. 유득공(柳得恭, 류득공, 1748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 1807년 10월 1일(음력 9월 1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문신, 시인이며 조선 정조 당시의 실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 (古芸居士), 고 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이다. 유득공 필적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 부사에 이르렀다. 규장각 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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