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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독도 처분의 해석은 어떠한가?(3) 독도,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독도 처분의 해석은 어떠한가? 국제법상, 일시적인 점령은 주권의 이전을 의미하지 않으며, 점령 등에 의해 주권이 현저히 훼손되었다고 해도, 원래 보유국의 동의가 없다면 주권의 이전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전후의 처치에 관련해 연합국이 독도의 방폐를 요구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일본이 독도의 주권을 방폐하는 동의가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GHQ에서 나온「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각서(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覚書)」677호 SCAPIN677(Supreme Command for Allied Powers Instruction Note No.677)「약간의 외부지역을 정치상 행정상으로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대한 각서」라는 문서에서, 일본의 영토.. 더보기
사드란? 탄도탄 요격유도탄, 직격파괴 사드(THAAD)란? 탄도탄 요격유도탄, 직격파괴 종말고도지역방어(終末高高度地域防禦,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 사드)는 미국 육군의 탄도탄 요격유도탄 체계로, 단거리(SRBM), 준중거리(MRBM), 중거리(IRBM) 탄도유도탄을 종말 단계에서 직격파괴로 요격하도록 설계되었다. 'terminal'은 종말 단계를 의미하며, 개칭 전에는 전구, 전역이란 뜻의 'theater'라 했다. 전역탄도미사일(TBM: theater ballistic missile)이란 사거리 300 km 이상 3500 km 이하인 탄도 미사일(SRBM, MRBM, IRBM)을 말한다. THAAD의 미사일은 탄두를 싣고 있지 않으며, 충돌의 운동 에너지로 다가오는 미사일을 파괴한다. .. 더보기
독도, 1905년의 일본의 독도 편입은 유효한가?(2) 독도, 1905년의 일본의 독도 편입은 유효한가? 1905년 1월 28일, 일본 정부에 의해 실시된 독도의 시마네 현 편입이 법적으로 유효한가 아닌가가 문제화되어 있다. 대한민국 측은 독도의 시마네 현 편입이 법적으로 불충분한 부분이 있어,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비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에 대하여 일본 측은 '국제법에 의한 적법한 수속이 이루어졌고, 또한 신문 등에도 보도되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는 지적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고 있다. 더구나, 판례에 비추어 보면 '비밀리에 실효지배를 할 수는 없다'고 되어 있어, 특정 편입 수속이 아니라, 그 실효성이 쟁점이 고 있다. 실효성 이외에 통지 수속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팔마, 그린란드의 판례에 비추어 볼 때 통지의무없으며, 통지의무를.. 더보기
독립협회, 한국민족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다.(2) 독립협회, 한국민족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다.(2) 독립협회 평가 독립협회는 청나라 등 중국의 예속하에 있던 것과 열강의 영향력을 비판하여 자주 독립을 주장한 것과, 백성들의 권리를 확립하며, 백성들의 인권을 최초로 주장한 점과 정치 참여를 최초로 주장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개혁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독립 협회는 외세의 조선 정치 개입을 비판하고 상징적인 존재인 독립문의 건립을 추진했으며 1898년에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혁신적인 개혁 정치를 요구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독립협회는 역적집단으로 취급되다가 대한민국 수립 후인 1960년대부터 민중의 참정권과 민권 사상을 고취한 점에 대한 점이 주목되면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말 한반도를 둘러.. 더보기
이회영, 체포와 옥사, 그의 죽음 원인은?(4) 이회영, 체포와 옥사, 그의 죽음 원인은? 만주사변 전후 1930년 4월 20일에 유자명, 장도선, 정해리, 유기석 등은 아나키스트 무력투쟁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만주 사변 이후에 이회영, 정현섭, 백정기 등의 주요 아나키스트 거물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기관지인 남화통신을 발간하였다. 이회영은 1931년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초 상해 사변이 일어나자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아 교섭, 자금과 무기지원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공격, 만주침략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여 협의기구로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흑색 공포단.. 더보기
이회영,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종 망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다.(3) 이회영,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종 망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다. 신흥무관학교 활동 1912년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1912년 경학사를 만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반(哈泥河畔)으로 옮겼다가, 경학사를 모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건립하여 독립군 병사 양성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해 흉작으로 경학사를 해산하고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진력했다.1913년부터 1919년까지 이회영은 극비리에 국내에 잠입하여 여러 인사와 접촉하였으나 극비리에 추진된 탓에 현재까지 이 기간동안 그의 자세한 행적이 전해져 내려오지않고 있다. 1917년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고종황제의 조카딸과 신부례를 올리는 기회를 엿보아 고종.. 더보기
이회영,교육진흥운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만주로 망명하다.(2) 이회영,교육진흥운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만주로 망명하다.(2) 독립운동 준비 계획 1905년 을사 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차츰 가시화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여 1906년 10월,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였다. 한편 그는 서전서숙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하여 동지획득과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했다.1907년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는 고종의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 더보기
안창호, 실력 양성론 주장, 학교 설립과 교육에 힘쓰다.(1) 안창호, 실력 양성론 주장, 학교 설립과 교육에 힘쓰다.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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