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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칠지도,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다. 칠지도,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다.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X-레이 촬영결과 앞면에 十(십)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발견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육차모(六叉鉾)’라는 명칭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73년 신궁의 궁사에 의해 명문이 발견되었고, ‘칠지도’로.. 더보기
임나일본부설,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한 임나일본부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 임나일본부,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한 임나일본부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說)는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임나(가야의 일부)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의 일부를 다스렸다는 학 설이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 개요 이 학설은 크게 3가지 사료로 나뉘어 생각되며, 이는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 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 더보기
진덕여왕, 김춘추를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하여 나당연합을 체결하다. 진덕여왕 석상 조각 신라 진덕여왕 추정 하반신상의 정면 진덕여왕, 김춘추를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하여 나당연합을 체결하다. 진덕여왕(眞德女王, ? ~ 654년, 재위: 647년 ~ 654년)은 신라 제28대 여왕(군주)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뒤를 이어 즉위한 647년부터 65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647년부터 648년 까지 상대등 알천(閼川)이 대리청정하였고 648년부터 654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내용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년)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 더보기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 관산성에서 신라군 도도에게 죽다.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 관산성에서 신라군 도도에게 죽다. 관산성 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찌르고 백제 성왕을 죽인 전투이다. 그 뒤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551년에 나제 동맹(433~553)을 맺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남평양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552년 고구려와 몰래 동맹을 맺고 553년 백제를 기습공격해 백제의 한강 유역까지 빼앗았다. 이에 성왕은 554년 태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에게 군사를 주어 신라를 치게 했다.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는 백제의 주력군 말고도 가야에서 동원한 군사와 왜(倭)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서기》긴메이키(.. 더보기
김유신, 삼한일통을 이루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다. 김유신, 삼한일통을 이루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다.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음력 7월 1일(양력 8월 18일))은 신라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외척이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 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 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 더보기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이다. 편찬 시기 고려 왕조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귀족 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앞 시대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로 편찬했다. 고기(古記)·유적(遺蹟) 혹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뽑아 편찬, 간행하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더보기
광개토대왕,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대왕, 고구려 19대 태왕 태릉왕의 입구 광개토태왕(廣開土王, 374년 ~ 412년?, 재위: 391년 ~ 412년?)은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이다.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安)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1년에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392년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태왕릉비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호는 영락이다. 백제와의 전쟁 광개토태왕은 392년 7월에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진사왕은 광개토태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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