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타이지, 숭덕제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써 파죽지세로 진격하다.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후금의 제2대 칸이자, 청나라의 황제(재위 1626년 ~ 1643년)이다. 휘는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한국 한자: 愛新覺羅皇太極 애신각라황태극).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부황인 천명제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을 이어받아 연호를 천총(天聰)이라 하다가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도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시호는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이다. 청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연호를 두 번 쓴 황제이기도 하다.(선통제는 연호를 대동, 강덕 3개나 쓴 적이 있지만, 대동과 강덕은 만주국에서 쓴 연호로, 청나라에서 쓴 연호는 선통이 유일하다.)
생애 초반
1592년 11월 28일 만력 20년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은 누르하치의 측실이었던 엽혁나랍씨 소생으로,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패륵(貝勒, 버일러: 부족장)이 되었다.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代善, Daišan), 누르하치의 아우인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Amin), 누르하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626년 천명 11년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누르하치가 죽자, 군사를 일으켜 누르하치의 대복진 오랍나랍씨를 강압적으로 순장시키고 한(汗, 칸: 만주식 군주 칭호)의 보위에 올랐다.
즉위
1627년 천총이라는 연호를 개원하였다. 즉위 당시 명나라와 교전 상태에 있어 주변 상황이 다소 어려웠으나 만주족과 한족과의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후 외정에 나섰다. 당시 조선 가도에 들어가 후방을 어지럽히는 모문룡과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던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항복을 받아 후방의 안정을 꾀한다.
몽골 정복
이어 또다른 적 몽골을 침공하여 후방을 더욱 안정히 하였다. 1631년 차하르의 링단 칸에게 승리를 하였다. 1635년 천총 9년 주변의 여러 국가를 침공 및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북원을 평정하여 링단 칸이 소유하고 있던 원나라의 전국 옥새(大元傳國 玉璽)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소수민족군대가 합류하여 더욱 강대해졌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쳐 청나라를 개국한 뒤 연호를 다시 숭덕(崇德)으로 바꿨다.
조선 침공
1636년 12월 여전히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써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1637년 1월 30일부로 전쟁을 끝내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치욕스런 항복을 하였고,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여 청의 연호 '숭덕'을 사용함으로써 명나라 정벌을 도왔다.
중국 진출
홍타이지는 후방이 안정되자 중국 본토를 노려, 산해관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중원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1643년 9월 21일 뇌출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내삼원(內三院)과 6부(六部), 군사 및 행정제도인 팔기군체제를 재정비하여 대청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사후 심양의 소릉(昭陵)에 안치되었다.
☞ 연관글
[역사보기] - 병자호란, 동아시아 역사에서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