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다.
조선 문조(文祖)(1809년 9월 18일 (순조 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6월 25일 (순조 30년 음력 5월 6일))는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자 왕세자, 문인, 시인이며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성은 이(李), 휘(諱)는 영(旲), 호는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본관은 전주(全州)다.
1812년(순조 12년) 7월 왕세자에 책봉됐고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했으나, 청정 4년만인 1830년 병사했다. 아들 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됐고, 고종이 그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자 황제로 추존됐다.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조선 국왕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으며, 추존왕들은 종묘에 배향될 때 영녕전에 모셔진다는 관례를 깨고는 유일하게 정전에 위패가 배향된 왕이기도 하다. 세자 시절에 사망했으므로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 불린다.
생애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 7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17년 3월 문묘에 입학례를 올린 뒤 성균관에 입학했고 1819년 3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관례를 치루고 그해 음력 10월 풍양 조씨(후일의 조대비)와 가례를 올렸다.
1827년(순조 27) 2월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이에 처가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 특히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됐던 소론계열 인사까지 등용했다. 1828년에는 창덕궁 안에 사대부의 집을 본따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다. 사대부들의 학구열을 궁 안에 도입하는 한 편, 부왕인 순조가 존호를 받는 행사를 치를 목적이었다.
1829년에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양수와 소식의 글을 가려 뽑아 사문조영(文史咀英)의 편찬, 간행을 명하고 정리자(整理字) 활자로 간행하다.
노론내의 다른 정차들과 일부 소론까지 중용하여 일각에서는 그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쇄신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한다. 불과 향년 22세였다.
그는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됐으며, 헌종마저 자식없이 죽자 익종과 6촌이되는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철종도 후사없이 죽자 헌종과 족보상 6촌형제이자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명복이 입승대통해 고종으로 즉위한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에는 양아들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됐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 내 수릉(綏陵)이다.
기타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춤을 출 장소인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이만큼 음악에 관심을 보인 조선의 왕 또는 세자는 세종과 세조 이후 유일하다. 조선에서 예악(禮樂) 곧 예의와 음악은 정치의 근본으로 여겨졌으며 정치의 기반을 다지려던 임금들은 예의 또는 음악에 관심을 쏟았다. 조선 전기의 세종과 세조 또한 그러하며 조선 후기의 효명세자, 곧 익종 또한 그렇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왕권이 약해지던 조선 후기에 왕권의 기반을 다지려 음악에 관심을 쏟은 것이라 여겨지며 이러한 바를 높이 사 아버지 순조는 그의 죽음 뒤에 글월(文)로 옛적(古)을 드러냈다(示)해서 문호(文祜)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은 1817년(순조 17) 3월 11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기념한 화첩이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있었다. 헌종 때 그의 어진이 그려졌고, 고종 때 다시 그의 어진이 제작되었다. 현전하는 것은 고종 때 그려진 어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중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동란으로 불에 일부 탔다. 그러나 영정의 훼손이 심하고 얼굴 부분을 알아볼수 없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현재 전하는 초상화로는 선원보략에 그려진 어진이 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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