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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무인정권을 출범하여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리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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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무인정권을 출범하여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리다.(2)

 

반란 진압과 집권 강화

 1198년(신종 1) 5월, 자신의 가노인 만적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미조이 등과 함께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며 그들과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거사일에 흥국사에 모인 노비는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만적이 거사일을 연기하자,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주인에게 거사 계획을 누설하고,다시 한충유가 자신에게 밀고하면서 만적 등 100여 명을 붙잡아 강에 던져 죽다. 이후 최충헌은 한충유에게 합문지후의 벼슬을 내렸고, 순정의 공로도 인정하여 그에게 백금 80냥을 주고 그를 면천시켰다. 1199년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이부지사(吏部知事)를 겸해 군권과 조정인사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다시 김준거의 난을 토벌하고, 1200년(신종 3년) 그를 처치하려는 음모가 자주 발생하자 경대승이 두었던 도방을 다설치하여 신변을 보호하였다. 1202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수대위상주국(守大尉上柱國)이 되었다. 추밀원사·이병부상서·어사대부로서 경주 별초군(慶州別抄軍)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4년 신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강요하여 태자(희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였고, 최충헌은 문하시랑동중서, 문하평장사, 상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 등에 책봉되었다. 희종은 그를 신하의 예로서 대하지 않고,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문하시중 진강후(晋康候)가 되었으며, 강군(晋康郡)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화를 중흥시키려고 힘썼다. 그해 4월 청교역(靑郊驛)의 관리들의 최씨 부자 살해 미수 사건이 생기자 영은관교정도감을 설치하여 혐의자를 색출하기도 하였는데,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이 도감은 뒤에 최씨 일문이 무단정치를 함에 한동안 일본의 막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희종 폐위

1211년 12월, 희종이 그의 권세에 눌려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하자 내시 왕준명이 중심이 되어 참지정사 우승경(于承慶)·장군 왕익(王翊), 홍적 등과 함께 그를 꾀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희종과 태자를 폐하고, 명종의 아들인 한남공 정(貞)을 옹립하여 즉위시켰다. 1212 그의 식읍이 진강부로 변경됨과 동시에 공신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진(瞋)을 세우니 이가 곧 고종이다.

1217년 다시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처형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일생중에 신종·희종·강종·고종의 네 임금을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써 최씨 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생애 후반

최충헌에게는 두 아들인 우와 향이 있었다. 만년에 병석에 누운 최충헌은 두 형제 간에 권력 다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곁에서 돌보던 아들 최이(최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최이(최우) 역시 이후 병을 핑계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차남인 최향의 벼슬이 장남인 최이보다 높았으나, 결국 자신의 뒤로 최이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사후

1219년 9월에 그는 연회에서 죽었다고 <고려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의 장례식은 왕과 다를 바 없었다 한다. 사후 4대에 걸쳐 세습 권력을 닦았으나, 고려멸망 후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반역열전에 실렸다.

 

기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반발했던 동생 최충수를 처형하고, 조카인 박진재를 제거했으며, 정적 손홍윤을 죽이고 그의 아내 임씨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 임씨를 첩으로 삼은 배경에는 동사강목에 의하면 '임씨는 장군 손홍윤(孫洪胤)의 아내였는데, 충헌이 홍윤을 살해한 뒤 그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차지하였다' 는 것이다. 1196년 3월에는 보현사의 승려들이 무신정권을 타도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전에 이를 접하고, 승려들을 살해함과 동시이강제, 문득려, 이인성, 이순우 등 기타 문,무신들 30여명을 인은관(仁恩館)에 가두었다가 살해하였다. 또한 이의민 등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복하던 두경승을 유배보내기도 했다. 만적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또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평가 

1217년(고종 4년)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興王寺)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 처형한 후로는 반대파를 대량 숙청하고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민란을 잘 진압하여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문운의 재흥 등 치적을 많이 쌓았다. 그는 고려 475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인 정치자로, 생전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렸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 최초의 무인 정권 가마쿠라 막부를 출범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유사하다. 최충헌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무인정권을 출범하였고, 권력의 장악을 위해 각각 친동생인 최충수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제거하였으며, 자식에게 정권을 세습하여 수 십년간 정권이 이어진다는 유사점을 가진다. 또한, 고구려연개소문, 일본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흡사하다. 그의 후처였던 왕씨는 강종의 서녀로 정화댁주(靜和宅主)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첩이었던 임씨는 왕족이 아닌데도 수성댁주

(綏成宅主)의 작위를 받았다. 다른 무인지도자들과는 달리 문신들을 적극 중용하여 형식적으로는 문치정권을 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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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보기] - 최충헌, 무인 정치자로, 생전에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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