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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김춘추의 맏아들, 삼국통일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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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김춘추의 맏아들, 삼국통일을 이루다.

 

문무왕(文武王, 626년 ~ 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 제30대 (재위: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이름은 김법민(金法敏)이다. 668년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신라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삼국통일을 이룬 왕이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661년부터 68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661년부터 678년까지 친정하였고 676년 아우 김인문(金仁問)이 잠시 실권 탈취 기도를 한 바 있으며 678년부터 681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김정명(훗날 신문왕)이 왕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출생에서 즉위까지

삼국사기》는 왕이 681년에 승하했다고만 했을 뿐 왕이 언제 태어났는지, 사망 당시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문무대왕비』에 따르면 왕이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56세였다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추산하면 문무왕의 생년은 진평왕 건복 43년(626년)에 해당한다. 진덕여왕 4년(650년)에 아버지 태종무열왕와 함께 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고종으로부터 태부경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654년아버지 김춘추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655년파진찬의 관등과 병부령직을 겸임, 곧 태자로 봉해졌다.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9년(669년) 여름 5월에 천정군(泉井郡)·비열홀군(比列忽郡)·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에 이미 비열성(비열홀군)은 다른 두 성과 함께 신라 조정의 군이 설치되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기록 뒤에, 《삼국사기》는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앞서 당에서 승려 법안(法安)을 보내어 구했던 자석(紫石) 두 상자를 보내고,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를 당에 보내 '사죄'하고 있다. 겨울에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구진천(仇珍川)을 당에 데려갔는데, 당시 '천보노(千步弩)'라고까지 불리며 한 번에 1천 보를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있던 신라의 쇠뇌 제작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이 해에 문무왕은 말을 기르는 목장 174곳을 소내(所內)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김유신을 비롯한 고위 진골 대신들과 여러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한성도독 박도유가 웅진도독부와 내통해 신라의 병기를 훔쳐다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는 난을 일으키려다 계획이 발각되어, 도유는 처형당했다.

 

당과의 전쟁

문무왕 10년(670년) 봄 정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면서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고, 김양도는 결국 신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당의 감옥에서 죽었다. 이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멋대로 백제 땅과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다'는 이유로 황제가 사신을 억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 이때쯤 신라와 당의 사이는 틀어져 있었다.

신라와 당의 첫 충돌은 문무왕 10년 봄 3월의 일로,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자가 거느린 정병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 달인 여름 4월 4일에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당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병이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데에 불리함을 느끼고 백성(白城)으로 후퇴했다. 6월에는 궁모성에서 거병한 고구려 흥복군의 일원인 검모잠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안승을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살게 하는 등 신라의 대당전쟁은 고구려 흥복군에 대한 지원이 수반된 것이었다. 고구려 흥복군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신라는 웅진도독부에 고구려 흥복군 진압을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장귀(首彌長貴)를 보내, 거병 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명분으로 신라와 웅진도독부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

 

한편 7월에 이르러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보내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웅진도독부에 속한 옛 백제 땅들을 차례차례 쳐서 주둔하고 있던 당병을 죽였다. 싸우지 않고 퇴각한 장수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있다. 8월 1일에는 고구려의 안승에게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신라왕의 '책봉' 형식으로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했다.

11년(671년) 왕은 군사를 일으켜 백제(웅진도독부)를 침공하였다. 당의 지휘를 받던 말갈병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것을 후방에서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당군이 백제를 구원하러 올 것에 대비해 대아찬 진공(眞功)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또한 6월에 장군인 화랑 죽지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했으며, 당병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7월에 당은 행군총관 설인귀를 신라에 파견했는데, 왕은 사신을 맞아 위로하는 대신 강가의 풀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 어귀에는 무기를 감춰둔 채, 수풀 사이를 오가며 틈을 노려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인귀는 26일에 당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주었는데 신라가 그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는 내용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당이 신라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법사 임윤(琳潤)을 시켜 왕에게 보냈다.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신라가 선왕 때로부터 당에 협조하고 여러 번 신라의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고를 내어 번번이 당군을 지원했던 사실과 당이 처음 신라와 했던 약속들을 어기고 신라가 점령하여 지배하던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한편, 백제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고 있다. 10월 6일에는 당의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672년 이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향해서도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 한편 전년 9월에 당이 고구려 부흥군 진압을 위해 평양에 파병한 장군 고간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의 여덟 곳에 해자를 파고 보루를 쌓아 진을 치고서, 8월부터 고려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 신라는 고구려 흥복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예군 등을 비롯한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유화책을 펴고 있다.

13년(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비롯해, 국원성(國原城, 옛 완장성薍長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또는 질암성迭巖城), 달함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러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이 사이에 국가의 원로이자 재상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이 죽고,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 거듭되는 전쟁에서 신라는 말갈·거란의 병사까지 끌어들인 당병과 맞서 아홉 번의 전투를 통해 2천 명을 죽이고, 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도 당의 선병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겨울에 당병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거란·말갈의 병사들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쳐서 멸했다. 한편 신라는 주(州)와 군(郡)에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고, 백제 멸망 뒤 무열왕에 의해 폐지되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

 

14년(674년) 당에서 숙위하다 귀국한 대나마 덕복이 가져온 신력(新曆)을 반포했다. 당은 문무왕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병을 습격해 죽이고,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백제령을 지배하에 두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한 항의로서, 왕의 동생으로 당에 머무르고 있던 우효위원외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그를 귀국시키는 편에 많은 군사를 딸려보내 대규모로 신라를 치려 했다.(다만 인문은 신라왕 책봉을 사양하고 있다.) 문무왕은 8월에 서형산 아래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벌이고, 9월에는 영묘사 앞길에서 다시 대규모 사열식과 함께 아찬 설수진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 달에 고구려왕 안승을 다시 보덕왕으로 봉했다.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가 되었다. 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당이 아닌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고, 왕 자신도 당이 거란·말갈의 병사까지 동원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과연 당은 가을 9월,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여기에는 앞서 문무왕에 의해 처형당했던 한주도독 진주의 아들로서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이 향도(鄕導)로서 도왔다. 그러나 이는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 29일에는 20만 군사로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고 있던 이근행을 쳐서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얻었다.(다만 이 전쟁 와중에도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있다.)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는 이 해,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더 얻었다고 설명한다.

16년(676년)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신라는 패했지만, 다시 나아가 22회에 걸친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여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이 후 당은 백제령 안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기고,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성을 거쳐 신성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에서 자국의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죽음

681년 7월 1일에 56세로 서거하였다. 유조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였고, 경주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장사하였다. 전설에는 자신의 사후 동해바다에 화장하여 뿌리면 자신이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후 무속의 신의 한사람으로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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