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보기

지증왕,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반응형

 

지증왕,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지증왕(智證王, 437년 ~ 514년, 재위: 500년 ~ 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왕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초기 삶

마립간의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임금이다.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 지도로, 혹은 지철로라고 한다.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이며 소지 마립간의 재종 아우이다. 부인은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이며, 소지 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어 64세에 왕위를 이었다. 514년 죽은 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이때 이후로 신라의 시호법이 시작되었다. 지증왕은 사탁부(沙啄部) 출신으로 왕위에 올랐다.

국보 제264호로 지정된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 의하면 그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 불렀다. 그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갈문왕에 제수되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배경은 그의 장남 원종(元宗, 뒤에 법흥왕으로 즉위)이 소지 마립간의 사위인 점이 작용했다. 서자 산종만이 있었던 소지 마립간은 사위인 원종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촌들을 제치고, 6촌이자 사돈인 그를 왕위 계승자로 내정했던 것이다. 소지 마립간의 서자인 산종은 후일 진평왕의 왕비 마야부인의 할아버지이며 복승 갈문왕의 아버지가 된다.

 

치세 기간

502년 순장을 금하고, 신궁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음력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503에 국호를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에서 “신라”(新羅)로 통일하였다.

즉위 초부터 그는 제도와 체제 개편을 추진하였다. 504년 음력 4월 상복법을 제정하고, 음력 9월에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509년에는 시사(市肆, 혹은 시전)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무역과 상인들의 거래를 단속, 통제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었다. 512년 실직주(悉直州)의 군주이자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체구가 커서 배우자가 없었던 지증왕에게는 알맞은 배우자가 없었는데 신하를 보내 신라 국내를 수소문하던 중 연제부인(延帝夫人)을 발견하여 배우자로 삼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기타

경주 지역 전설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성기는 커서 그 길이가 1자 5촌(약 45cm) 정도가 되었다고 하며, 궁녀나 왕족, 귀족의 딸 중 적당한 여인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하들이 왕비가 될 여성을 찾으러 다니던 중 경주 남산의 연못에 큰 똥덩이가 있는 것을 보고, 그 큰 똥의 주인이 여성이라면 왕을 감당할 것이라 보고 수소문한 끝에 이찬 박등혼의 딸이라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등혼의 딸을 간택하여 왕비로 들이니 그가 왕비인 연제부인이라는 것이다.

 

☞ 연관글

[역사보기] - 천마총,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 돌무지 덧널무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