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왕, 고안승, 고구려 부흥운동 때 왕으로 추대되다.
보덕왕(報德王) 또는 보덕국왕(報德國王) 고안승(高安勝, ?~?, 재위: 670년 ~ ?) 또는 고안순(高安舜)은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부흥운동 지도자이다. 670년 고구려의 장군 검모잠이 당나라에 항거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작했을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 일설에는 보장왕의 서자라는 설과 연정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683년 문무왕의 누이와 결혼하고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생애 초반
안승의 생년월일은 미상이며 출신과 성씨도 미상이다. 안승의 출신에 대해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는 보장왕(寶臧王)의 아들이라 하고, 《삼국사기》〈신라본기〉는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삼국유사를 따르면 그의 성은 고씨가 되고,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를 따르면 그는 연씨로써 연개소문의 조카에 해당된다. 유년시절 및 고구려에서의 행적 혹은 관직 경력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나와있지 않아 미상이다.
고구려 부흥운동
668년,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멸망당한 뒤, 안승은 사야도(史冶島)에 머무르고 있었다. 670년에 검모잠이 사야도에 있던 안승을 한성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일으켰다. 그 후 고구려 부흥군은 소형 다식(多式)을 보내 신라에 대해 복속할 것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군량문제를 놓고 부흥군에서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신라 귀족으로의 편입
신라로 투항한 안승은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고구려왕에 봉해졌다가, 674년(문무왕 14년)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금마저(지금의 익산) 일대에서 보덕왕에 봉해졌다. 보덕왕의 지위는 보덕국의 왕이라는 설과 작위라는 설이 존재한다.
679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 지역을 평정한 후 나당전쟁에 참전, 당 군을 격퇴하였다. 680년 (문무왕 20년)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리고 문무왕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문무왕의 조카딸과 재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본부인은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683년(신문왕 3년) 서라벌에서 문무왕의 조카딸과 혼인하여 소판(蘇判)의 관위를 받고 김씨의 성을 사성받은 뒤 집, 토지를 하사받아 진골 귀족이 되었다.
683년 안승이 신라 귀족으로 편입된 데에 불만을 품은 부하 대문(大文) 등의 무리가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 관군에 진압되었다. 대문의 반란을 진압한 신라는 익산 금마저에 금마군(郡)을 설치했다. 이후의 안승의 자세한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망년도와 묘지는 미상이다.
평가
안승에 대한 후대 평가는 사료 부족으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고구려 유민들을 신라 땅에 정착시켜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와 큰 공을 세움으로써 신라에 편입되었을 때 공신급인 6두품의 지위로 확정하게 하여 사실상 신라 진골. 6두품 세력과 거의 대등한 입장에 서게 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 부분은 몰락한 가야계 진골 출신인 김무력과 김유신의 성장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5두품으로 격하된 백제계와는 상반된 것으로, 이는 통일신라 200년간 한번도 신라 내에서 고구려계의 지위가 6두품 아래로 격하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알 수있다. 이는 안승이 현실적인 외교 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형성된 고구려계의 힘은 뒤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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