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다.
동성왕(東城王, 445년~501년, 재위 : 479년~501년)은 백제의 제24대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모대(牟大)이다. 또 다른 이름은 마모(摩牟)·마제(麻帝)·말다(末多)·여대(餘大)여대(餘大)등이 있다. 제22대 왕인 문주왕(文周王)의 아우인 좌평(佐平) 곤지(昆支)의 둘째 아들로서 담력이 있고 활을 쏘는 솜씨가 뛰어났다.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한 뒤 정권을 잡은 진씨(眞氏)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삼근왕의 뒤를 이었다.
479년부터 50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479년부터 482년까지 진로(眞老)가 실권을 맡았고 482년부터 501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동성왕의 본명은 모대 또는 여대, 마모이고, 일본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는 말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은 전지왕의 손자로,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 한다. 모후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체류하다 사촌 삼근왕이 살해되자 아버지 곤지에 의해 백제로 보내져 즉위하였다. 동성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48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이듬해인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488년(동성왕 10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 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493년(동성왕 15년)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고,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에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으며 놀기만 했다. 499년(동성왕 21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동성왕 22년) 봄에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501년(동성왕 23년) 겨울 음력 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쿠데타를 일으켜 병사들에게 처형당했다.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이라는 것을 인용하여 "백제신찬에 이르기를 말다왕이 무도하여 폭정을 펼치니,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백제의 국인이 함께 그를 제거하였다. 무령왕을 옹립하니 휘는 사마왕인데,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동성왕)은 이모형(이복형)이다.(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立 諱斯麻王 是 昆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라고 기록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무령왕과의 관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측의 저서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고 동성왕의 동생이라고 한다. 한편 그의 딸 보과부인(寶菓夫人)은 신라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고 남모의 외조부가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무령왕의 이복 형이다. 이 설은 신뢰받지 못하다가,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의해 무령왕이 462년에 태어났음이 밝혀지면서 점차 신뢰를 얻고 있다. 무령왕은 462년 출생하였고 523년 사망함이 묘지명에 기록되었다. 동성왕은 445년에 출생했고 501년에 백가에게 처형되었다. 동성왕이 무령왕보다 17세 많은데, 동성왕이 17세에 둘째 아들 무령왕을 낳기는 생리적으로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