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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대한민국을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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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대한민국을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연 사건이다.

 

5·16 군사 정변(五一六軍事政變)또는 5·16 군사 쿠데타(五一六軍事 coup d’État)는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부평, 수색, 포천 등에서 쿠데타를 목적으로 일어난 유혈 군사반란을 말한다. 주동자는 서울을 관할하는 제6 관구의 전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로 밝혀졌으며 그는 미국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군의 참모총장 몰래 십수명의 장성 및 수십명의 핵심 영관급 장교들과의 사전모의를 통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사전에 참여 병력으로는 김포 공수단 1000여명, 해병 제1여단 1300여명, 6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 1700여명,제6군단 포병단 5개대대 3000여명과 제5사단(사단장 채명신 준장이 이끌고 서울 진주), 제12사단(사단장 박춘신 준장과 부사단장 및 작전참모가 이끌고 춘천 진주), 제30사단(부사단장, 작전참모, 헌병부장이 사단 이끌고 서울 진주), 제33사단(작전참모, 연대장 등이 이끌고 서울 진주), 그리고 2군을 비롯한 지방에 있던 여러 장교들까지 수만명에 이르렀다.

제2공화국은 이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공병대를 제외하고, 서울 인근에 있는 모든 전투 군부대가 이미 반란군에게 장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시작전 통제권을 쥐고 있던 주한미군 총사령관이 불개입 의사를 표시하고 2군단장 등이 사후동조를 하면서 휴전선 인근의 일선부대를 대거 차출해야 했던바 진압을 고의적으로 포기해버렸다. 이 사건의 결과로 한명의 민간인과 십여명 이상의 군인이 죽거나 다쳤으며 제2공화국은 와해되고 군인들이 세운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삼권을 장악해 3여년간의 군부독재를 실시하였다.

 

정변의 원인

5.16의 발단은 정군 운동이었다. 이는 곧이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그해 말에 이르면 박정희를 혁명의 지도자로 세우자는 데에 합의하였다. 박정희 소장은 만주군관학교 인맥, 군내 인맥 등을 이용해 장경순, 한웅진, 채명신, 이주일 등 자신과 알고지내던 육군장성과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면 부관감실에서 근무하던 오치성이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제1201야전공병대 포섭은 실패해였다.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 그러는 동안 제2공화국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이러한 정보를 조금씩 보고받거나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형욱 등은 전라도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성들과 결합해 서울 인근 부대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소문, 족청계 장성들을 중심으로 일선 부대가 거사할 것이라는 소문 등 역정보를 3중, 4중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 주체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쿠데타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 오히려 군경합동수사 결과 체포된 김덕승은 허위진술을 해버렸다. 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쿠데타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는 정보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지만 실상은 장도영도 육군방첩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속아넘어가고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해병대를 끌어들이는 한편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군 내부의 알력다툼과 인사적체로 인한 불만을 쿠데타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국군은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일본군 출신, 만주군 출신, 함경도파, 서북파 등 여러 군벌로 형성되어 있었다. 창군 직후에는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이 중용되었으나, 이들은 김구와 정치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승만 정권 출범과 함께 주요 요직에서 제거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을 중용하였고, 훗날 이들의 세력이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 출신을 중용하여 일본군 출신을 제거하였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는 주류 세력에 편승하지 못했고 그와 함께 육사5기, 육사8기 그룹 역시 소외되어 승진길이 막혔다. 결국 이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하극상을 일으키게 되고, 그들이 주도 세력이 되어 하극상파를 이루어 쿠데타를 주도한다.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 그리고 군 내부 인사들의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CIA

1964년 5월 3일 BBC 인터뷰에서,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 군사 정변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친미 이승만 대통령을 물리적 폭력시위로 강제로 내쫓은 4.19 혁명을 반미혁명으로 판단해, 조속히 친미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발발한 반미 쿠바혁명 때문에, 쿠바혁명을 모방한 반미혁명이 전세계로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크게 우려했으며, 4.19 혁명도 이러한 제2의 제3의 쿠바혁명으로 판단, 시간이 더 지나서 혁명이 공고해져 쿠바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서둘러 친미혁명을 일으켜 반미정부를 전복시켜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정변 초기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3-5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요청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장도영으로부터 정변이 발생했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그 직후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美 대리대사 린은 윤보선을 접견했다. 접견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하며,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군부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명령서를 들고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가 '사인만 하시면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공산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 美 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그는 당시 정변 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 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정변의 성공을 잘 알 수 없었던 박정희는 매우 초조해하며 흥분한 상태였다. 이즈음 장도영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제8군 미군사령부를 오가며 매그루더 장군과 이야기를 했다. 5월 17일, 매그루더박정희 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박정희 소장은 절대적으로 군을 물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정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정변 성공 후 윤보선의 활동

1961년 5월 19일 대통령 윤보선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5월 20일에 성명발표를 번복하였다.

 

"금번 군사쿠테타가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박정희장도영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장도영,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

결국 윤보선은 당일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결과

접견실에서 박정희, 장도영 등을 만난 대통령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애초의 혁명공약 제6조를 추후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미국과의 동맹강화·구악일소·경제재건 등을 공약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쿠데타를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는 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 또한 군정 세력은 취약한 정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제1공화국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없었던 점을 지적, 1962년 3월 1일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평가와 비판

4.19 혁명을 민주 문화의 배양기로 보고 5.16 군사정변을 민주 문화와 상반되는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은 사건으로 보는 비판이 있다.

재일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장면 총리의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 라며 총리 장면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다.

혁명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지지부진했던 친일파와 기득권 청산 문제에 불만을 가졌고, 장면 정부 역시 이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기에 불만이 팽배했다. 더욱이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민정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주장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박정희의 공약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민정이양과 친일세력 청산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장준하는 쿠데타 적대 세력의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혹평했다.

 

후문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국제연합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고 주장했다.

정변 직후 허정은 정부에 전화하였지만 연결되지 못했다. 허정에 의하면 국제연합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군사정변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정변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국제연합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혁명 직후 허정장면 총리윤보선 대통령에게 연락하였으나 모두 연락이 불통이었다.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정변의 저지를 위해 국제연합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 허정1963년 초의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이 점을 문제삼아 윤보선을 공격하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의 예측

북한은 5·16 군사 정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 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주재 중공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 혁명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하오 중공 측에 혁명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군사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군사정변 주도세력을 남로당계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서는 "극심한 반동에 의한 쿠데타이며, 혁명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공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 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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