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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

경명왕, 경주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다 경명왕, 경주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다. 경명왕(景明王, ? ~ 924년, 재위: 917년 ~ 924년)은 신라의 제54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승영(昇英)이다. 신덕왕(神德王)과 의성왕후(義成王后)의 첫째아들이며 경애왕(景哀王)의 형이다. 왕비는 신라 금입택(금을 입힌 집) 중 하나인 장사택(長沙宅)을 소유한 가문인 각간(角干) 김대존(大尊)의 딸이다. 생애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 더보기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군주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다.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 더보기
견훤, 금성전투, 공산전투, 고창전투, 운주성 전투, 신검의 정변 견훤, 금성전투, 공산전투, 고창전투, 운주성 전투, 신검의 정변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수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금성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됨과 동시에 바다를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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