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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길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다. 길재,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다.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등을 통해 사림파로 학맥이 계승되었다. 생애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더보기
정여창,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 종성에서 사망하다. 정여창,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 종성에서 사망하다.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 ∼ 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더보기
김굉필,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 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다.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더보기
사소부인, 박혁거세 거서간의 생모, 선도산의 산신 사소부인, 박혁거세 거서간의 생모, 선도산의 산신 사소부인(娑蘇夫人) 또는 서술산성모(西述山聖母)는 《삼국유사》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생모로 전혀 내려오는 인물로, 경주시 선도산의 산신이다. 다른 이름으로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파소부인(婆蘇夫人) 등으로도 불린다. 점필재 김종직은 사소부인이 지리산 산신과 동일인이라 보기도 했다. 생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박혁거세 거서간이 하늘에서 강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백마가 운반해온 큰 알에서 박혁거세 거서간이 나왔다는 내용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연은 이 이야기 옆에 작은 글씨로 주석을 단다. 서술자가 말하기를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박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 더보기
연산군, 사림파의 간쟁을 무시하고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다. 연산군, 사림파의 간쟁을 무시하고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다. 연산군(燕山君,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융(㦕: 忄+隆), 본관은 전주(全州). 성종의 장자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이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았다. 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王妃)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사림파 문인들과 충돌하다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사림파와 양대 .. 더보기
유자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다. 유자광,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다. 류자광(柳子光, 1439년 ~ 1512년 6월)은 조선의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복(于復), 우천(宇天)이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황해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찬성, 겸 영.. 더보기
허균, 김종직 비판과 주목.(2) 허균, 김종직 비판과 주목 종전 후 허균은 학문 연구와 과거를 준비하던 중 글 「김종직론」을 지어, 사림의 중시조로 추앙받던 김종직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종직론(金宗直論) - 교산(蛟山)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利祿)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榮華)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더보기
성종, 조선의 태평성대와 그 이면, 평가와 비판 성종,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하다. 즉위 이후 수렴 청정 기간 반발세력을 무마하고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을 군에서 대군으로 책봉하고 이들을 좌리공신에 임명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권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길재-김숙자 등의..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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