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선조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 광해군 폐위 후 시호와 능호 모두 삭탈되다.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 광해군 폐위 후 시호와 능호 모두 삭탈되다.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년 11월 16일 ~ 1577년 6월 13일) 또는 공성왕후(恭聖王后)는 조선의 제 14대 왕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왕후이며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생모이다.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의 시호와 성릉(成陵)의 능호가 올려졌으나 광해군 폐위 후 시호 및 능호는 모두 삭탈되었다. 존호는 명헌(明獻)이다. 본관은 김해이다. 생애 사포(司圃)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 해령 부원군(海寧府院君)에 추증된 김희철의 딸로 1553년 11월 16일 (음력 10월 11일)에 태어났다. 궁인으로 입궐하여 선조의 승은을 입은 뒤 내명부 정3품 소용(昭容)이 되었다. .. 더보기
인목왕후,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다. 인목왕후,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다.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일)는 조선 선조(宣祖)의 계비 이다. 흔히 인목대비(仁穆大妃)로 불리나, '인목(仁穆)'은 죽은 뒤에 받은 시호(諡號)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선조 때 '소성(昭聖)'이라는 존호를, 광해군 때 '정의(貞懿)'라는 존호를 받아 통칭 소성대비(昭聖大妃)라 불렸다.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대왕대비가 되어 '명렬(明烈)'이라는 존호가 더해졌고, 죽은 뒤 '광숙장정(光淑莊定)'이라는 휘호 와 '인목'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고종 때에 '정숙(正肅)'이라는 존호가 추가로 더해짐으로써, 정식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昭.. 더보기
이이첨,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폐서인해 죽이다. 이이첨,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폐서인해 죽이다. 이이첨(李爾瞻, 1560년 ~ 1623년 3월 14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득여(得與),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본관 은 광주(廣州)이다. 선조 연산군 시절의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다. 또한 이정립과 남인계열로 간 이덕형은 그의 일족이었다. 사상적으로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인홍의 문하생이다.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다시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훗날 광창부원군(廣昌府原君)에 봉해졌다. 북인이었다가 북인이 대북, 소북으로 나뉠 때는 대북에 가담했으며, 대북의 지도자였다. 선조 말기에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소북의 음모를 저지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이후 류영경과 임해군, 영창대군 등을 폐 .. 더보기
정명공주,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영창대군의 누나 정명공주,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 영창대군의 누나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년 6월 27일(음력 5월 19일) ~ 1685년 9월 8일(음력 8월 10일))는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이며 영창대군의 누나이다. 광해군 때 폐서인되어 어머니와 함께 감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인조반정 후 공주로 복권되고 중추부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했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유년기 1603년 6월 27일(음력 5월 19일)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선조의 21번째 자식이자 10번째 딸로 태어났으며, 선조에게는 유일한 적녀이다. 선조는 52세의 나이에 본 늦둥이 딸 정명공주를 무척 귀여워했으나 이복오빠 광해군이 즉.. 더보기
김개시,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다. 김개시,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다. 상궁 김씨(생년 미상 ~ 1623년)는 광해군 때의 상궁이다. 본명은 김개시(金介屎). 원래 처소나인이었는데 선조의 눈에 들었고, 결국 선조의 승은을 입었다. 일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회임하였을 때 도깨비 소동으로 유산을 시키려 하였고, 궁 안에 선조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녀가 선조의 약밥에 독을 타 독살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생애 그녀의 출신은 알수 없지만, 야사(野史)에 따르면 1600년 전후에 궁에 궁녀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세자(世子)인 광해군을 만났고, 광해군을 모시는 궁녀가 된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눈에 띄어 승은을 받아 특별상궁으로 되었고, 미모는 아니나 민.. 더보기
황윤길,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견하다. 황윤길,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견하다. 황윤길(黃允吉, 1536년 ~ 몰년 미상)은 조선 중기의 문신, 외교관, 정치인이다. 자는 길재, 호는 우송당, 본관은 장수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다. 1590년 선조 때 통신사 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변란의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견하여 유명하여졌다. 생애 황희의 5세손으로 그의 가계는 훈구파였지만 그는 사림파에 가담하여 출사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가까이 지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조 때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조선통신사 각처에서 활약하던 일본의 무사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선조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 을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조선에서.. 더보기
김성일, 잘못된 판단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다. 김성일, 잘못된 판단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다.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 더보기
곽재우, 붉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1) 곽재우, 붉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문장의 글귀가 왕의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40세가 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질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한다. 여러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