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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사료를 보면 당대사람들이 원균이 용장이라고 주장하나 아군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굴며 외적만 보면 도주하 는 장수가 용장이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조정에 목을 보내는데 집착하고 공을 세우는데 욕심을 냈다 는 사료를 참고해보면 사실은 자기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떤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실록 기록들 경상 우수사(慶.. 더보기
권율, 행주대첩, 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다.(1) 권율, 행주대첩, 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다. 권율(權慄, 1537년 ~ 159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1537년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아갈 생각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그가 .. 더보기
이덕형,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 오성과 한음 이덕형,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 오성과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 형제간이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생전부터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화되었다. 한성부 출신이다. 출생과 유년기 이덕형은 1561년 한성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전)의 누이 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뇌가 영특하여 소년 시절에 벌써 .. 더보기
선조, 국가의 큰 재앙을 스스로 자초한 무능한 왕 선조의 목릉 선조, 국가의 큰 재앙을 스스로 자초한 무능한 왕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성은 이(李), 휘는 연(昖),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첫 작위는 하성군이었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 (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 더보기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어가다. 영창대군의 묘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어가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 ~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 조선 제14대 왕 선조와 그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들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의(㼁), 본관은 전주(全州) 이다. 선조에게는 적자와 서자를 합해 총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영창대군은 선조가 55세 때 얻은 유일한 적자이다. 이 때문에 영의정인 소북의 유영경등은 한때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했고, 이는 후에 그가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원인 이 되었다. 생애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에 선조와 인목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 태어나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에 강화 유배지에 서 사망했다. 선조는 .. 더보기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역모인가? 조작인가? 사진 출처 : 디지틀 조선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역모인가? 조작인가?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 께 3년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 정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 립과 .. 더보기
훈련도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창설부대 훈련도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창설부대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5군영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어 그 중심을 차지하였다.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역사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전통적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오는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거해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선조 26년)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다. 정병(精兵) 양성과 기민(飢民) 구제 임무를 맡아 오다가 1594년부터 수도 방위·국왕 호위 임무를 겸하여 종래 오위가 담당 하던 기능을 대신하였다. 이어서 5군영 체제가 갖추어지자 어영청·금위영.. 더보기
김시민, 3800명의 군대로 진주성을 지켜내다. 김시민, 3800명의 군대로 진주성을 지켜내다. 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 11월 21일 (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 (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김시민 장군의 동상 생애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경기어사의 서찰로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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