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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안평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 계유정난으로 사사당하다. 안평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 계유정난으로 사사당하다.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 1453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서예가, 서화가, 시인, 작가이다. 이름은 이용(李瑢),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 · 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에 능하였다.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는 1431년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친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 더보기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鄭麟趾, 1396년 12월 28일 ~ 1478년 11월 26일)는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하동,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 더보기
맹사성,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다. 맹사성,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다. 맹사성(孟思誠, 1360년 8월 28일/음력 7월 17일 ~ 1438년 10월 22일/음력 10월 4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이다.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 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생애 초반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으로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에 수록됐다.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고려.. 더보기
황희 정승, 논란과 의혹,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단점에도 세종의 신임을 받다. 황희 정승, 논란과 의혹,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단점에도 세종의 신임을 받다.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음력 2월 8일) )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조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 더보기
소헌왕후, 세종의 왕비,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 소헌왕후, 세종의 왕비,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10월 12일 (음력 9월 28일) ~ 1446년 4월 19일 (음력 3월 24일))는 조선 세종의 왕비이다. 별호는 공비(恭妃),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이다.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靑川府院君 安孝公 沈溫)의 장녀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집안이 멸문당한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마찬가지로, 소헌왕후 또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을 잃는다. 특히 남편 세종대왕을 이해하고 내조를 했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이는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이다. 일생 1395년 문하시중 심덕.. 더보기
용비어천가,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용비어천가,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 세종 때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지은 악장·서사시이다. 정인지와 안지, 권제 등이 짓고,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 정인지가 서문을 쓰고 최항이 발문(跋文)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 지어 1447년(세종 29년)에 간행하였다.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모두 125장으로 조선 개국의 위대함과 시련을 노래했고, 그것이 하늘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내용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 등 조선의 선대인 6대에 걸쳐 그 사적을 노래했다. 제1장, 제125장 등 10여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장이 2절로.. 더보기
집현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다. 집현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다. 집현전(集賢殿)은 정이품아문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이자, 왕실 연구기관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집현전)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더보기
영정법, 최저 징수액 1결당 4두로 고정 징수하다. 영정법, 최저 징수액 1결당 4두로 고정 징수하다. 영정법(永定法)은 조선 중기 1635년(인조 13년)에 시행된 전세 징수 방법의 한 가지이다. 종래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작황을 9등급으로 나누어 전분 6등, 연분 9등을 조사하여 차등있게 전세를 징수하였지만, 영정법이 시행되면서 법제적으로 종래의 최저 징수액이었던 1결당 4두로 고정 징수한 방법이다. 배경과 내용 15세기 세종 연간에 제정된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은 토지의 작황을 일일이 조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미 15세기 말부터 풍흉에 관계 없이 1결당 4~6말을 징수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후, 농지가 황폐해지고 농민 생활이 피폐해지자 조선 정부는 인조 13년 관행을 법제화하여 풍흉(풍..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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