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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한

영조,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이유 영조,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이유 탕평책 실패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도세자는 경종비 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와 후궁 숙의 문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된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 더보기
홍봉한, 사도세자의 처형과 세손(정조)의 제거를 반대하지 않았다. 홍봉한, 사도세자의 처형과 세손(정조)의 제거를 반대하지 않았다. 홍봉한(洪鳳漢, 1713년 ~ 1778년)은 조선 말기의 대신으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장인이다. 당색으로는 노론의 당원이었다.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인 174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광주 부윤·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1761년(영조 37년)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으로 이천보, 민백상 등이 갑자기 의문의 최후를 맞이하자 일약 승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뒤 영의정에 재직 중 사도세자의 처형을 목격하였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에 부응하여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의 내용을 담은 시무 6조를 제시하는 등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다. .. 더보기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봉수당에서의 회갑연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이었으나 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 ​(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 더보기
사도세자, 장조인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는 당쟁 때문이었나? 사도세자, 장조인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는 당쟁 때문이었나? 장조(莊祖,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윤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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